어김없이 돌아온 시조부님 제사 준비를 해서
시댁에 다녀왔다.
결혼 13년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나는 아직도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으로 과한 스트레스를 받고
그 자리에서는 할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분한 마음을 남편에게 퍼붓기도 하고
내내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리석은 자, 그 이름이 며느리라서 그런것인가...
분하게 생각 할 필요도 없는 정말로 사소한것들이라고
흘러 들어버리고 무시해버리면 될것들도 난
그걸 가슴에 담아두고 심하게 마음의 분노로 묻어 놓는다.
출간외인.... 아들이기때문에 며느리가 이렇게 와서
음식도 만들고 한다는둥의 말...
우리 두딸들로 만족하고 이젠 그만 낳을거냐는 애기..
자신의 딸들만한 시누도 세상 천지에 없다는 말...
자기 아들이 번돈.. 남자가 돈을 버니 어쩌고 한다는둥의 말들..
얽혀져 있는 나에겐 시어머니 티가 팍팍 나는 말들로
소심하고 꽁함 나의 마음에 또 한번 상처를 남겼다.
그러곤 나는 내 가슴에 그런 모든 말들을 가슴에 새기고
나의 가계부에 시댁경조사비로 지출비로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다.
시댁 제사를 마치고 이틀이 지난 다음날
나는 생전 처음 출장식 뷔페일을 하러 다녀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3시반에 남편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리곤 톨게이트시절 함께 근무하던 언니 차를 타고
서울 문정동에 도착을 해서 새벽 4시반부터
오후 5시반까지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왔다.
너무너무 힘이 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고
화장실에 가서 혼자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버거운 노동이었다.
그 일을 오래 한 언니도 여느날보다 좀 버거운 날이었다고
말을 하면서 내가 다음번에 이런일 다시 하지 않을거라고
어림잡아 짐작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식들을 준비해서 아침 9시에 나서서 수원까지
내가 운전을 해서 함께 주방일을 했던 일행들과 갔다.
경희대학교 수원 캠퍼스에 도착을 해서 그곳 무슨 세미나로
500명분의 뷔페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직 몰랐다.
출장식 뷔페일이 그렇게 고된 노동일었는지를....
500인분의 식기와 음식들 그리고 음료수,
거기다가 500명이 앉을수 있는 테이블까지 뷔페에서 대여를
한다는것을.....여직 모르고 있었다.
20대의 어린 남자애들이 두명에다 책임자 남자 한명 뿐이라서
힘센 우리나라 아줌마들인 그날의 음식 준비했던 나와
다른 아줌마들도 모두 나서서 함께 행사장까지
그 식기들과 장비들 그리고 500명이 먹을 음식들을 승강기로
수십번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계단도 오르내리면서
한여름에 흰색 면티가 흠뻑 젖을정도로 날랐다.
거기다가 이번엔 작은접시에 일일히 음식들을 분배를 해서
테이블마다 나르는일까지 겹쳐서 배는 더 힘들었고,
강의인지 세미나인지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어찌나 급하게
음식들을 날라야 했는지 눈썹이 휘날리게 뛰었다.
그로 인해 얼마전에 구입한 내 검정색 굽낮은 샌달은 다 헤져 버렸고,
무슨 장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관님 지나가신다고
입구에 배치되어 있는 집기 박스들을 얼른 치우라고 외치는
학교 관계자의 외침에 음식을 담다가 부리나케 짐들을 치우르랴...
그야말로 땀을 뻘뻘 흘려야 했고 밥먹고 앉아서 쉬는 시간이
10분도 되지 않았고 무거운 집기들을 나르랴 어깨가 빠지는것
같았고, 허리가 뻐근해서 집에 도착을 해선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높은 양반이 오시면 늘 그렇게 모든 관계자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무슨 장관인지 물어보고 싶었고,
그날 행사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으나 순 영어로만 인쇄되어
있는 안내책자로 무식한 나는 전혀 알지 못했고,
다만 외국인들이 바글대고 순 영어로만 진행되는걸 듣곤
나의 무식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그 젊은 대학생들 틈바구니로
열심히 짐을 나르는 나의 초라한 모습으로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가졌던 그런 경험을 했었다.
그러지 않아도 빈티 나 보이는 나의 마른 외모는 그날의
고된 노동으로 더 가난하게 헐벌은 모양새였을것이고,
그런 나의 모습에 스물 한두살로 보이는 남학생 두여명이
내가 나르는 짐을 나눠서 들어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기도 했었다.
행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들을 버리고 휴지를 줍고
식탁보를 거둬 내고 백여개에 가까운 테이블을 접는 일을 돕고,
마지막에 남은 음식물 찌꺼기까지 모두 수거해서 트럭에
싣어야 할때에는 나의 이미 온몸은 흐물거렸다.
다시금 돌아오는길에도 초보 운전자인 나는 면허증을 가진
아줌마가 나와 톨게이트 근무하는 언니밖에 없어서
수원에서 문정동까지 앞차를 열심히 쫓아서 운전을 해서 돌아왔다.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는 애길 들었을때는 진짜 쓰러질것 같았다.
그나마 나와 두명의 언니들은 다른 아줌마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을 했다고 설거지에서 빼준다고 해서 다행히 나는
집에 7시가 되서야 집에 돌아올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그곳에서 싸준
김밥 1줄을 먹고 아이들에게도 저녁 차려 먹으라고
애길 하곤 깊은잠에 뻐져 들었다.
허리가 아프고 팔도 아파서 방바닥에 누웠을대엔
옆으로 돌아눕는것조차 힘이 들었다.
참 내가 그동안 육체적인 노동의 일을 진짜
안해 봤구나를 절실하게 실감했으며,
고생도 안해보고 팔자 좋게 살았구나를 절감했으며
그렇게 힘들게 번돈이 단돈 7만원이 내 통장으로
입금 되었을때에는 돈 버는일이 이렇게 힘이 들구나를
뼈가 저리게 실감을 했다.
큰아이의 충치 치료로 이달에 50만원을 카드로 긁어야 해서
그 돈을 갚아보려고 그 일을 시작해본것인데
내 체력에 버거운 일이었던것 같다.
하지만 1주일에 한번만 하는일이라면,
짐나르는 일만 안한다면 힘에 부쳐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운동을 안해서 그런가 해서 토요일날에 그 무거운
몸으로 집가까운 약수터 산길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올라갔다.
그 일을 한지 3일이 지난 지금은 어깨와 목은 풀어졌으나
허리가 여직 아파서 낼 모레 목요일날에도 연수원 행사일이
있다는 그날 함께 일한 언니의 전화를 받고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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