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전에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사무실에서 받은 월급은 70만원을
받았고, 65만원이던 월급에서 5만원을 올려받기 시작한게 몇 개월
되지 않을때즘에 남편과 결혼과 함께 직장생활을 접었다.
결혼한해가 1997년도였고 그 당시 남편의 월급은 110만원이었다.
매달 10만원씩 회사에서 받은 대출금을 갚고 있던 관계로 실제로
남편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98만원이었다.
회사에 대출금이 있다는 사실도 결혼이후 수개월이 지난 다음에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남편의 월급을 98만원으로
알고 있었고 그 98만원중에서 55만원을 적금을 넣던 알뜰한 새댁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러는 우와중에도 새내기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에게
착해 보이려고 놀러가실때마다, 생신이나 제사때마다 수시로 2,30만원씩
매달 드리고 시댁 친정 모든 경조사에 봉투를 낼 수 있었던것은 있었던것은
내 결혼식에 받았던 축의금 350만원 남짓이 통장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혼여행을 돌아와서 입원해 계시던 시아버님 병원비 50만원을 드리고,
결혼이후 앨범대금으로 나간 경비 100만원도 일체 우리가 책임을 졌으며,
결혼이후 장기간 입원해계시던 시아버님 병문안을 날마다 가는 일도,
그로 인해 의료보험 공단에서 날아온 초과된 의료비 100만원도 남편의
월급 98만원으로 살면서 모두 우리가 충당을 했었다.
그 당시엔 그게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결혼1년후쯤 폐렴으로 입원하신 시아버님
병수발을 위해 병원에서 먹고 자는일을 보름동안 할때조차도 나는
그런 일은 너무 당연하다고, 멀쩡하신 시어머님과 집에 전업주부로 있는
가까이 사는 시누가 있었어도 며느리인 내가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되려 당사자인 나보다, 동생들과 친구들이 나의 시어머니를
흉볼때도 우리 시어머니 흉을 보는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만큼 순진했으며 착하고 마음 여린 새댁이었다.
시아버님의 병수발과, 남편의 천만원짜리 사건이 내 결혼이후 첫 시련이라
고 내가 느끼던 그즘에 나는 지금의 첫아이 임신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그런 시련들도 별거 아니라고, 결혼생활 하다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그나마 사람 안다치고 건강하고 그리도 기다리던 임신이라서 기쁜 마음을
갖자고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시련에 그다지 약하거나 절망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결혼 첫1년동안의 시련을 겪으면서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남편에게 알아서 해결 하라고 맡기는 아내의 역할을 했다면
지금 현재의 남편과 나와의 관계와 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히 달라졌을것이다.
1년 불입하던 55만원 적금을 해지해서 남편 손에 들려주면서 그 돈이 아까운것보다 남편이 그로 인해 겪었을 마음 고생이 더 가슴 아팠으며, 그 어떤 원망도 하지 않고 술취해 괴로워 하던 남편의 모습을 보던 그 다음 날, 그렇게 바로 적금을 깨서 "자기야, 돈은 정말 별거 아니야, 기죽지마!" 를 부르짖던 어리석은 아내의 역할을 나는 톡톡히 해냈었다.
그게 시작이었던 것을 그 당시엔 난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시어머님이 아버님의 병원비를 늘 속여서 부풀려 애길 해서
98만원 월급 봉투를 통째로 들고 시댁을 향하는 일 따위도 나는
그 사건 이후엔 하지 말았어야 했다.
98만원이 들어 있던 봉투에서 어머님 보는 앞에서 50만원을 드리면서도
통째로 못드린것에 죄송해 울먹거리던 착한 콤플렉스 며느리 모습은
그 날이후에도 한참을 지속했던 나의 어리석음이여.
장마가 지나고 나서 세입자 방 공사해주셔야 한다고 시어머님의 한숨어린
하소연에 대출을 받아서 100만원을 보태줬던일도 나의 나약한, 어른의 대한
예의로 착각이었다는걸 알기 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었다.
간헐적으로 늘 그렇게 시댁 그리고 심심치 않게 금전적인 사고를 쳐주는
남편으로 이혼을 결심을 한적도 있었고, 울고 불고 나의 선택의 후회스러움으로 밤낮 없이 나의 대한 자책을 하던 몇 년의 시기가 있었다.
회상해보면 결론적으로 늘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가 선택를 했으면서,
나보다는, 내 아이들 보다는 시댁이 먼저, 남편이 먼저 그리고 모질지 못하고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게 싫어서 나중엔 의무감에 질질 끌려 다녔다.
그렇게 불어난 우리집 부채가 4년전엔 8천만원 가까이에 다달랐다.
그중에 절반은 시댁과 남편의 공로가 컸지만, 가장 큰 책임은 우리집 경제권을 쥐고 움직이던 나의 책임이었다.
마음의 불편함이 싫어서 현금 서비스, 대출을 받아서라도 시어머니의 푸념에 돈을 갖다 바치던 나약한 나의 마음이 가운데에 있었던것이다.
장남이면서 부모님 생활비 한푼 못보태준다는 그 말에 심한 상처를
받으면서도 빚을 내서라도 시댁에 할 것 하면서, 시어머니에게 기죽기 싫다는 오기로 그래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빚이 8천만원 될 때까지도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정작 내가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예전하곤 많이 달라진 며느리로, 아내로 존재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시어머니에게 하고 싶은말,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의 막말(?)
을 하는것에 대꾸하고 싶은걸 못하고 있는 며느리인 것은 똑같지만,
이젠 나에게 더 이상 시어머님는 대놓고 목돈을 마련해달라는 식의
애긴 전처럼 편하게 하시질 못하신다.
대신에 행로를 바꿔서 남편에게 대놓고 하고 계시지만~
톨게이트 근무시절에도 몇 번 시어머니의 그런 부탁어린 명령은
존재했었다. 형으로서.... 동생이 살 방 한칸 구할 돈에 좀 보태달라고~
객지에 혼자 사는 미혼의 시동생이 방을 구하는데 300만원 정도 구해
달라고..... 어머님이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남편은 바로 나에게 의논을 했고
나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그리고 해주고 싶은 당신 마음 알지만, 도련님
생각하면 나도 해주고 싶다라고, 허나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부채가 얼마인데
그 빚을 갚기 위해 내가 직장생활 시작했는데.... 그리고 울억거린척 쇼도 했다.
그리곤 한마디 덧부치는 걸 잊지 않았다.
나 모르게 해주고 싶으면 해주라고, 대신에 나랑 더 이상 부부로 살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나는 이미 그때 알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조금은 낫다는걸.
그럼에도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을 주면서 아들 내외에게 그때에도 그 빚을
떠안기고 자신의 재산에 손대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것을~
우리 시어머니, 지금도 일을 하셔서 돈을 버신다.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으시지만 참으로 힘들게 돈을 버시며
사치나 허영도 없으시는 분이다.
서울쪽에 현 시세 3억 가까운 아파트에서 살고 계신다.
시어머님도 빚이 있으시다. 한 2,3천만원....
그리고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어머님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 다 장남인 우리에게 물려주실것처럼 뉘앙스를 풍김으로서 자신이 힘(?)이 있음을
수시로 확인시켜주시는것도 잊지 않으신다.
미혼인 시누와 미혼인 시동생이 있다. 나이가 많다.
나는 시어머니의 재산 단돈 10원도 받고 싶지 않다.
시어머니 모시게 되면 나는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 시누와 미혼인 시누와 시동생이 어머님 재산 갖든지 말든지
하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님에게 우리가 얹혀 사는꼴로는 안 살것이다.
아마 나의 이런 마음은 어머님의 대한 그동안 쌓아온 내 미운 마음이고 서운했던 감정들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어머님이 우리 두딸들에게 주시는 5천원 만원 용돈도 어머님
명의로 되어 있는 통장에 한푼도 빠트리지 않고 적금을 5년 가깝게
넣고 있으며, 결혼 햇수별로 시댁으로 들어간 경비도 따로 목록을
만들어 프린터를 해놓은 예전 것들을 여직 없애지 않고 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명절이나 제사때 가서 고생한다고 시아버님이
나에게 주신 용돈들도 난 절대 쓰지 않고 모았다가 2년후에 60만원
정도 되었을때 돌려드렸던 며느리였다.
어머님이 해주신 반찬도 고맙게 받아서 먹고 있으며
어머님 나중에 힘없어지면 함께 사는것도 당연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허나 죽어도 어머님의 자신의 존재를 대우 받기 위해 그 아파트 한 채
같은 재산 같은걸로 어떤 뉘앙스를 풍기실때면 연세드신분의 대한 안스러움보다는 금전적으로는 절대로 어머님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받고 싶지가 않다.
톨게이트 직장을 다니면서 첫월급을 받았을때
나는 눈물이 날뻔 했으며 그 돈이 너무 아까워서 쓸수가 없어서
거의 한달이 지나서야 이리저리 송금을 해서 처리를 했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내 월급으로 내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열심히 빚을 갚으려 애를 썼고 보일러도 새로 교체하고
컴퓨터 본체도 바꾸고, 중고차도 사서 타고 다니는 사치도 경험할 수 있었다.
회사내에서 있던 경조사는 절대 빠트리지 않았으나 나를 위해
돈주고 산 것은 정말로 유니폼에 받쳐 신을수 있는 단화 3컬레와
유니폼 바지 여유분 한 벌씩 그리고 파마값이 나에게 쓴 돈의 전부였다.
파마를 한지 1년이 넘어가고 있다.
회사를 퇴사한지가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직장생활을 할때에도 주변의 머리 좀 어떻게 하라는 동료들의 충고와
CS교육만 아니었다면 그 때에도 나는 파마로 돈을 소비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2년 7개월 맞벌이를 하면서 우리집 부채 8천만원을
4천만원으로 격감 시켜놨다.
여기서 더 이상의 빚을 늘게 하지 않으려고 나 아주 많이 노력하고 있다.
전기콘서트도 안쓸때 무조건 뽑아 놓고 있으며 (예전에는 그런것엔 전혀 관심 안뒀다)
보일러도 하루라도 집 비우면 전원을 아예 끄고 텔레비전도 정해진 시간만 보려고 한다.
핸드폰도 아예 해지 할까 생각중이다.
계획에 없던 작은아이 핸드폰 구입으로 인해 우리집 통신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고 있는데 이번 도시가스 요금이 5만원이 넘게 나왔다.
나는 그런 알뜰한 주부가 아니었는데 요즘엔 아주 작은것에서부터
돈을 아껴써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지금도 마트가서 물건 구입을 할때 일일이 따지고 사진 못한다.
길가다가도 애들 머리핀이나 이쁜 옷 있으면 사주고 싶어하고 가끔씩
은 지금도 충동 구매도 하는 그런 날라리 주부이긴 하지만
예전의 나에 비하면 아주 많이 알뜰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천성은 어쩔수 없겠지만 공과금에선 줄여 볼 생각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못버릴 것 같다.
공짜로 우리집에 들어오는 작은 물건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기 때문에 그런것들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께 톨게이트 다니던 언니가 우리집에 놀러왔다.
말번 근무인데 혈압이 있다고 해서 이 근방 병원에 들렀다고
내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잠깐 왓다고, 집앞으로 나오라고 하는걸
내가 우리집에 올라 갔다 가라고 했다.
귤1박스를 배달을 시킨 그 언니가 아이들을 위해 아이스크림도 사왔다.
그 언니가 사온 귤박스를 뜯어서 절반을 덜어 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화장대안에 있던 남자스킨로숀세트와 핸드크림 그리고 손세정제,
마스크팩 그리고 남자 100사이즈 골프 티셔츠와 마1박스(가루로 된)
를 챙겨서 언니 차에 실었다.
여전히 남에게 퍼주는 나를 보면서 언니가 되려 미안해 한다.
허나 다 우리집에 공짜로 들어온것들이다.
잊지 않고 날 찾아온 언니가 고마웠고 근무하는동안 내 차를 타고
카풀을 하면서 정들었던 아주 성실하고 착한 언니였다.
어젠 남편이 시음용으로 직원들에게 나눠준 샘플용 복분자술을 5박스나
가져왔다. 늘 그러하지만 나는 일단 남편이 술을 가져오면 제일 먼저
저 술을 누굴 줘버릴까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추석때 들어온 선물용 복분자 세트도 아직 베란다에 모셔놓고 있다.
지난달 동생집에 갈때에도 우리집에 남아 있던 모든 술박스들을
전부 동생집에 주고 돌아왔다.
동네 친하게 지내는 언니들은 오로지 소주만 그것도 참이슬만 좋아해서
복분자는 줘도 달가워 하지 않아서 이번엔 복분자를 연말에 있을
친구집에서 있을지 모를 모임에 가져가기로 했다.
지난주에도 워드를 배우는 수강생들에게 마스크팩을 나눠주었다.
뭔가를 집에 쌓아 놓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사용하지 않는 마스카라나 아이라인 같은 화장품은
시누에게 받으면 누군가에게 준다. 그걸 자주 이용하는 주위 여자에게...
그게 나의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하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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