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분의 아버지를 가졌으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자리가 어떤건지 모른다.
결혼식 날, 내 손을 잡고 입장해주신 친정아버지가 계신다.
나와 동생들과는 성이 다른 친정아버지가 계신다.
올해 일흔 세살이시고, 농사일을 하시며, 겨울철엔 미장일을 하시는 부지런한 분이시다.
술이라는 것도 평생을 입에 대지 못하시는, 자신을 위해서는 담배 값 말곤 전혀 쓸줄
모르시는 뼛속까지 부지런함과 검소함이 깊이 박혀 있는 그런 분이시다.
자식들이 주는 용돈 한 번을 흔쾌히 받지 않으셨던, 자식에게 용돈 받는것에
무척이나 불편해 하시며, 자존심 상해하시는 그런 친정아버님이시다.
우리 세 자매의 아버지가 되신지 벌써 햇수로는 20년 가깝게 되었지만 조금은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하지만 친정엄마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계시는, 존경하실만한 그런 든든한 친정 아버지로 존재해주시고 계신다.
내 나이 8살적에, 세 딸과 서른 다섯이 된 아내를 세상에 남겨두고 하늘로 먼저 가신 친정아버지가 계신다.
그 시대에 마흔 가까운 나이에 병약한 몸으로 스물 여 섯된 엄마와 결혼을 하셨다.
먹는 것만 잘 드셨어도 살 수 있던 폐결핵이라는 병으로 술, 담배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신분이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4명의 고모들과 1명의 삼촌을 내게 주신 아버지였다.
늘 잔기침을 하셨고, 내가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글씨를 반듯하게 쓰지 않는다고
회초리를 드신 기억을 내게 남겨주신 아주 병약한 내 친정아버지는 큰 딸인 나에게
각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어느 봄날 새벽에 , 눈을 뜨신 채 맏이인 나를
끝까지 응시하시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또 다른 친정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8살인 나는 장례를 치루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차가운 주검이 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드리라는 고모의 말이 무섭기만 했던 8살딸이었다.
2001년 4월 어느날에 남편의 전화로 며느리로서 시아버님의 장례를 치뤘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시지 못하셨던 시아버님, 남편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잘 생긴 미남이셨다.
보미 애비랑 결혼해줘서 고맙다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고생한다고 며느리인 나를 안스러워 하신 아버님이셨다.
눈이 벌개진 남편이 나를 밤낮으로 쫓아 댕겨서 할수 없이 결혼해준거라는 농담으로 시어머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던, 키가 큰 며느리를 꼭 보고 싶어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아버님이셨다.
수시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시면서 당뇨로 인한 모든 합병증은 다 경험하시고 마지막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
며느리가 아르바이트 해서 번돈으로 사드린 겨울 외투을 닳을정도로 그 옷만 입으시던,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자신의 손으로 며느리 손에 용돈 5만원을 꼭 쥐어주시던,
며느리 손 잡고 백화점 가서 이쁜옷도 사주고 맛있는것도 사주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님의 병수발을 들던 며느리에게 늘 미안해하시던 그런 든든한 나의 버팀목 같던 시아버님이 계셔었다.
나의 두딸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내 남편,
뭐사달라고 하면 무조건 사주는 아빠라서 딸들은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한다.
두딸들이 잘못을 해도 절대로 잔소리를 하거나 크게 야단을 치는 법이 없었다.
첫아이 보미가 5살적에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을때, 생전 처음 시키지도 않는
앙증맞은 토끼 모양의 가방을 사들고 온 내 남편이 두딸들의 아빠로 존재하고 있다.
두딸들이 나중에 더 이뻐져서 딸들을 쫓아다닐 놈들 단속하려면 자기가 좀 피곤할것
같다고, 그 놈들중에서 누굴 골라야 할지, 자기 같은 놈 손잡고 오면 어떨할까 걱정하는 남편이다.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두딸들 자랑은 못하면서 남들이 두딸들 칭찬하면 입이 귀에 걸리는 그런 아빠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떤건지 모르고 살았다 . 딸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떤건지..
남편에게 바라는것은 그뿐이다. 내두딸들의 아빠로 건강하게 오랫동안 딸들 곁에 함께 있어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