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공장에서 이틀동안 아르바이트 하다 온 것 같다
작년에 150포기 김장을 하신 친정엄마는 내년(올해)부터는 느그들이 알아서 김장해서 묵어라 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고도 작년에도 100포기를 더 담으셨었다.
작년에 나와 동생은 엄마의 김장을 돕기 위해서 내려갔지만, 딸 들이 고생할까봐서 우리들은
내려 가서 뒷 정리만 하고 돌아왔었다.
밭에서 배추를 뽑을 때부터 도와 드리겠다는 말을 했던 나는, 올해도 김장을 절이는 것은 도와 드리지 못했다.
올해도 270포기를 절궈서 내가 내려갔을 때는, 절반 정도는 이미 씻어 놓으셨었다.
이구동성으로 엄마 김치가 맛은 있는 데 좀 짜다고 나불대는 자식들 때문에, 소금을 덜 절여서
배추를 절이는 데 세 번이나 다시 절이기를 반복하셨다고 하셨다.
김장할 때 도와 주지도 않는 것들이 입만 살아선 짜다 어쩐다 했다니, 그 주둥아리가 참 미우셨을 것 같다. ^^*
양념속을 만드는 데, 다시마 끓인물을 사용한다는 애기는 늘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완도에 사는 집안 고모님이 해조류들을 자주 보내주신 관계로, 미역과 다시마는 늘 친정집에서 볼 수 있었다.
새우젓과 멸치 젓갈도 끓여서 하루 식혀야 하고, 묵은 고춧가루는 안 쓰고, 새 고춧가루로만 김장을 하신다.
올해는 그나마 고추 농사가 아주 잘되셔서(동네에서 엄마만 젤로 잘됐다고 하셨다) 전부 다 팔아 먹어서
정작 김장에 쓸 고춧가루가 좀 부족해서 딸에게 보내준 고춧가루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양념장을 만들어서 휘젓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몇 번 돌리지도 못하고 아빠가 양념장을 휘젓고 나는 군데군데 잡히는 죽덩어리들을 으깼다.
쪽파들과 대파들도 모두 엄마가 미리 썰어서 준비를 해 놓으셨다.
오후 2시에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배춧속 양념장을 만드는데만 4시간이 넘게 걸렸다.
태어나서 그런 많은 양념장을 처음 만들어 볼 수 있었으며, 사진속의 양념장을 저 통 말고도 큰 통으로 하나를 더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2시간 남짓 전기장판에서 몸을 녹인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밤 9시에 나서서 하우스 안에
설치 해놓은 감장 준비(?)으로 들어가서 절여져 있는 나머지 150포기 배추들을 헹궈서 물을 빼기 시작 했다.
오메~~~~ 절인 배추 씻는 것이 그렇게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해야 한다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입에서 오메~~~ 오메...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흔살 쳐묵은 딸년이, 올 여름에 허리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시기 까지 부모님 앞에서 허리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소리는 낼 수 없었다.
그 징한 배추 씻기 일을 하면서, 그 동안 이런 것을 늘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앉아서
김장김치를 받아 쳐묵기만 했던 내 자신이 참말로 부끄럽고 엄마 아빠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밤11시가 너머서 배추 씻는 것을 끝내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김치 공장을 방불케 했던 친정에서의 김장 하기 첫 날은 그렇게 후딱 지나 가 버렸다.
집에 내 기럭지에 맞는 엄마의 몸빼 바지가 없어서 빨간 츄리링 차림에 패션어블한 빨간 장화를 신고 본격적인 김장 버무리기를 준비했다.
아침 8시가 넘어가자, 슬슬 동네 어르신분들이 김장 품앗이를 하러 오시기 시작 했다.
친정엄마가 이미 여럿집을 김장 품앗이를 다녔고, 우리네 김장이 끝나고도 두 군데 김장 품앗이는 미리 예약이 되어 있었다.
아침을 토란국에 든든하게 먹고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나도 이리저리 분주하게 댕기면서 엄마 일을 도우려고 애를 썼다.
물론 중간중간에 엄마의 지시에 빠릿 빠릿 못해서 뭔년.... 뭔년 욕도 들었지만 그래도 내 엄마가 하는 욕은 하나도
서운하지도 , 상처도 되지 않았고, 엄마랑은 싸워도 그걸 푸는데는 10초도 안 걸리는 모녀지간이었다.
하지만 울 엄마 같은 시어머니라면 나는 이 날, 수십번은 눈물 콧물을 뺐을거라는 생각은 해봤다.
물론 엄마도 내가 며느리였다면 그렇게 막, 무식하게 대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욕은 더더욱 안 하셨겠지만 말이다.
한 쪽에서는 물을 뺀 배추를 나르고, 어르신들은 버무리고 엄마와 나, 막내 딸은 김치통과
큰 통에다가 버무려져서 완성된 김치들을 담고, 한 쪽에서는 김치를 보낼 택배 박스들을 만들고 있었다.
광주에 살고 있는 막내 동생이(아버지의 막내딸)이 남편과 함께 일손을 도우러 왔었다.
김치 냉장고용 김치통 10개를 들고 온 동생은 종일 설거지를 해댔다.
어르신들은 손으로는 김치를 빠른 속도로 버무리시면서도 입으로는 열심히 말씀(?)들을 하셨다.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뉘집 자식들 이야기에, 정치인들과 북한의 이번 연평도 폭격까지.... ^^*
40대인 나보다 시사에 더 밝으신 분들이셨다.
그리 많은 양념장을 만들었음에도 270포기 김장을 하다보니 속이 부족해서 부랴부랴 양념장을 다시 새로 만들었다.
이 양념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시금 내 친정엄마의 급한 성격이 나오셨다.
엉거주춤거리며 부지런히 뛰어 댕기는 멀대 같은 큰 딸년인 나를 보고, 엄마가 니년은 부엌에 가서
아짐들 드실 점심밥이나(?) 준비하라고 하셨다.
자식들과 작은집과 이모집으로 보낼 김치 택배를 제일 먼저 포장하기 시작 했다.
짜다고 나불대던(엄마의 표현) 자식들 김치를 제일로 먼저 쌌다. 먹어보고 덜 짠 것으로 먼저 포장했다.
석화 들어 간 것, 안 들어 간것도 따로 엄마가 구분을 했다.
난 어떤 게 어떤 건지도 모르겠드만, 엄마는 그걸 잘도 구분하시더라~~
무거운 것들 잘 드는, 힘 쓰는 것은 아주 잘 하는 나를 보고도 엄마는 잔소리를 엄청나게 하셨다.
저 년이 무식하게 힘쓰는 일만 할라고 한다고... 저러다가 허리 삐긋하면 어쩔라고 그러냐고....
뭘 해도 못미더운 큰 딸년은 그렇게 엄마에게 종일 욕을 많이 먹어야만 했다.
그래도 무거운 김치통 30개가 넘는 것들을 나르는 것은 전부 몽땅 엄마 모르게 내가 해치웠다.
돼지고기를 아궁이에서 찌고, 주방 가스불에서 동태찌게를 끓이고, 밥을 하면서 비닐하우스를
몇번 왔다 갔다 하면서 나는 고기 한 점도 못 먹어봤고, 그래서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이번 김장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못 찍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
김치 냉장고 2대에 들어갈 김치들을 나르고 나서, 장독대에 담을 김치들도 정리를 했다.
점심을 드신 어르신들을 모두 가시고 나서 부터 본격적으로 뒷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광주에 사는 막내가 김치통으로 10개를 들고 올라 갔다.
내 김치는 택배로 하나로 부치고 올라오면서도 내가 한통들 더 들고 올라왔다.
택배로 보낼 것은 김장을 한 날, 바로 택배를 불러서 발송을 했다.
다음 날 김치 택배를 잘 받았다고 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전화는 모두 내가 받아야 했다.
엄마는 다른 집 김치 품앗이를 가셔서....
그리고 하루가 지난 다음 토요일날, 무거운 짐 3개를 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오토바이로 짐을 싣어다 주신 아빠가 올라오는 차표까지 끊어 주셨다.
김장값을 드리면은 이, 미친년아 빚이나 갚어 하실 엄마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통장으로 김장값을 미리 송금하고, 올라오면서 엄마에게 말씀 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들은 욕은 똑같았다.
주제를 모르는년, 니가 돈이 어디 있다고... 빚이나 갚지.. 정신 차려 ... 니 딸들 키울려면 독하게 살아야 돼...
우리 새끼들은 왜 이리도 욕심들이 없는지... 하시는 단골 레파토리를 한참을 또 읊으셨었다.
김치들과 아울러 이번에도 엄마가 싸주신 것들을 정리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늘 느끼거지만 친정에 다녀 올 때마다 내가 도둑년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늘 챙겨주신 것들은 다 챙겨 들고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무거워서 내 손에 들려 보내지 못한 무우와 시래 말린 것들과 고구마를
어제 또 택배로 보내셨다고 하니, 오늘 또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택배를 받게 될 것 같다.
나는 울 엄마 같은 엄마가 내 두 딸들에게 절대로 못 되어 줄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이번의 아주아주 비싼 김치공장에서의 아르바이트의 대한 기행문을 마무리를 해 본다.
한 일에 비해 너무 많은 아르바이트비를 챙겨서 심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