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버지의 장례식을 끝내고....
가끔씩은, 미리 글을 써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요일날 올린 글도 며칠 전에 예약을 해놓은 거였고
월요일 글도 지난 주에 예약을 해놓은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지금 생활하고는 다른 글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토요일 오전에 제 작은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입원해 있던 남편도 함께 갔습니다.
저와 두 동생들은 3일동안 작은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지냈습니다.
조카 남매 말곤 아무도 없는 작은아버지의 초라한 장례식장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20년만에 돌아온 작은아버지의 딸을 저희도 장례식장에서 20년만에 처음 봤습니다.(20년전에 집을 나갔습니다)
할머니 장례식 때 보고, 이 번에 처음 본 작은아버지의 아들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 했습니다.
남편에게 숨기고 싶은 우리집 이야기중 하나가, 제 작은 아버지 집 이야기였습니다.
전 그랬습니다. 남편 보기 부끄러운 작은아버지라서 제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가난한 작은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고 있지 않는 작은 아버지라서 부끄러웠습니다.
저와 동생들 어린시절엔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삼촌이셨는데,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파탄을 내신 작은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싫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집안 쪽에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자존심 상하는) 그런 친척이 한 사람 정도는 있다고 하지만
전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작은아버지가 무조건 싫었고 그래서 작은아버지와의 왕래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친정 행사에 참석은 했으되, 으례적인 인사만 나눌뿐, 작은아버지가 제게 주신 어린시절의
고마운 추억은 다 모른 척 했고, 현재의 작은아버지의 초라하고 비뚤어진 삶이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참, 나쁜 못된 조카딸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 아름다운 기억 중앙에는 늘 작은아버지가 계셨는데도 말이죠.
작은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객사를 하셨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이었습니다.
그런 예감은 왜 그리도 잘 맞는건지.......................
도로변에서 달리던 차에 치여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날 새벽에도 그 망할 술을 마시고 가시다가, 차에 치였고 얼마동안이나 쓰러져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행인이 발견하고 신고를 해서 병원에 옮겨졌지만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뺑소니를 당하셨습니다.
늘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고모님을 비롯해, 작은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부검을 해야 했고, 올해 64세이신 작은아버지는 고통으로 굳어진 표정으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안 봤으면 좋았을텐데...... 저도 숨을 쉬지 않고 계시는 작은아버지의 수의 입으신 모습을 봤습니다.
고통으로 이그러진 그 표정을 보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고,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서른 두살 된 덩치만 큰 아들과, 20년동안이나 한 번도 못 본
딸내미를 남겨 놓고 어떻게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아버지와의 아프고 못쓸 기억들을 너무나도 많이 갖고 계신 작은 고모님의 오열하는 모습이 젤로 가슴 아팠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고모집 큰 오빠가 작은아버지의 유골을 단지함에 쏟으셨습니다.
고모집의 4명의 오빠들과 특히 큰 오빠가 없었다면 작은아버지의 장례도 치루지 못했을겁니다.
관을 들 사람이 부족했는데도, 여자인 저와 두 동생들은 관을 들 수 없다고 해서.................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관습입니다.
이런 장례식을 치룰때마다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딸 혹은 여자는 하면 안된다는, 쓸데없는 관습이 참 싫어집니다.
저와 동생들이 2박3일동안 장례식장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몇몇분의 문상객의 식사 심부름과, 장례비도 안 될 것 같은 부줏돈 계산 정도 였던 것 같습니다.
새우잠을 잤는지, 뭔잠을 잤는지 모르겠지만 이 번에도 저와 두 동생들은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시골에 계시는 엄마를 대신해서 작은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있었지만 그냥 앉아만 있다 온 것 같습니다.
결혼해서 산다는데도 어디서 사는지도 알려주지 않는 20년만에 얼굴을 본 **(작은아버지 딸)도
내일이면 시댁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자긴 걱정 안해도 되니 남아 있는 재산(?) 같은게 있다면 다 오빠 주라고~~
**는 그래도 세상살이는 좀 아는 것 같은데, 하나 밖에 없는 지 오빠랑 가까에 살면서
좀 돌봐주면 좋을 것 같은데..............
연락처는 저희에게 알려줬지만 20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도 말해주지도 않고 어디 사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버지도 **를 20년동안 못 보고 사시다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셨습니다.
그 놈은 장례식에서도 지 동생 볼 때 말곤 울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살이를 전혀 모르는 &&(작은아버지 아들)는 고모와 저희들을 한숨쉬게 합니다.
언제까지 돌봐줄 수 있을지... 고모님 연세도 이제 일흔 넷이고, 몸도 안 좋으시고
할머니의 오랜 병수발만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신 분입니다.
저희들 또한 어느 정도까지만 돌봐 줄 수 있을 것이고, 서른 두살이지만 세상살이에는
초등학생만큼도 안되는 생각을 갖고 사는, &&를 보면 앞 날이 갑갑해져 옵니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작은아버지의 나쁜점만 그리도 쏙 닮았는지, 장례를 치루면서도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가 뭘 해 먹고 살지, 죽지는 않고 살 수는 있을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른 두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한
조카를 보면서 저와 동생들 마저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저는 작은아버지의 뺑소니로 국가에서 지원 받을 수 있는 장례비용건에 대해 알아보고,
둘째는 내일 지낼 작은아버지 삼오제 음식을 준비해서 고모댁으로 가서 고모를 모시고 작은아버지집으로 갈겁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작은아버지의 지하방 정리를 위해서 저도
내일즘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일에도 모르는 척 하면서 살았으면서도 무슨 선행이라고
불우이웃 성금을 하는 척 하고 살았는지........... 참 위선적으로 살았던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전, 또 제 생활위주로만 살 것이고, 지금과 같은 조카의 대한
관심은 오래 갖지 못하고 살겠지요..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