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사람으로 알고 있는 나, 지나치게 바르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성적외엔 모범생으로 지냈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내가 공부도 아주 잘 했던 모범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학교성적만은 형편 없었던 학생이엇다.
20년이 지나 만난 친구들, 보형이 넌 공부도 잘 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지 않았냐는 말을 한다.
그 이면에는 학창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의 시상들과 감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학생 대표로 어버이날의 효행상 수상, 글짓기 수상, 선행상 수상과
등교 때 복장과 두발 및 명찰 단속을 하던 선도부와 교련간부를 지냈고
교무실을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던 학급일지를 쓰던 서기일을 했었고,
우리 학교를 대표로 교감선생님과 광주에서 열리는 학생의 날 참석을 했으며
체육대회 때면 전교생이 입장할 때 한복을 입고 선두에 서서 피켓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창시절 친구들은 내가 지금도 가정생활에 있어서 남편이나 시댁, 육아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모범적인 아내와 며느리, 엄마로 살고 있을 거라고 착각들을 한다.
결혼 10년차에 처음 가졌던 직장이던 톨게이트에서 함께 근무했던 50여명의 직원은
퇴계원에서 일산간의 고속도로 요금소 중, 불암산 톨게이트에서 근무했던 나를
틀에 박힌 전형적인 우수사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곳 근무 2년8개월동안 2차례의 우수사원 수상과, 고객CS의 대한 공무전에서의 대상 수상
라디오 프로그램에 3회에 걸쳐 간식을 신청해서 직원들에게 인심을 썼고
근무하는 동안 3회에 걸쳐 라디오 프로에 나의 이름과 아울러, 내가 근무하던 불암산 톨게이트를
전국적으로 알리면서, 톨게이트 수납사원들의 애환의 글을 올려 전화연결까지 했던
나를, 청소를 아주 잘 했던 사원으로 기억 하고 있다.
하지만 학창시절 실제의 나는
학생의 본분인 학교 공부엔 도통 흥미가 없어서, 공부를 거의 안 했으며,
수업 태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좋았으나, 수업시간에 머릿속으로 늘 딴 생각을 했던 여학생이었다.
또한 친구들에게도 널리 알리지 않은 채, 타 지역의 사는 남학생들과 펜팔을 뻔질나게 하면서
소설이나 시집들의 문구들을 적당히 짜집기를 해서 체신부에 크게 공헌을 했던 여학생이었다.
현재 결혼생활도 학창시절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범적인 주부 역할은 못하며 살고 있다.
여전히 남자들이 젤로 싫어하는 잔소리가 지나치게 많은 마누라고 존재하고 있으며,
시어머님의 대해서는 겉으로는 도리 운운 하며 며느리 역할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으며,
아이들의 대해서는 심하게 자제하고 있으나, 하루에도 반복적인 잔소리들을 해대며 아이들을 괴롭히는 엄마로 존재하고 있다.
톨게이트 근무시절의 나는,
근무하던 민자고속도로가 개통하던 첫 날, 이론으로 배웠던 요금소 근무를 처리하는 데
심하게 서툴러서 눈물을 흘리면서 근무를 하던, 업무 능력에서만은 형편 없던 수납사원이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고 친절해야 하는 수납사원으로서 동료들의 비해, 차량처리가 빠르지 못했고
굳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운전자들을 대하던 날들이 더 많았던 수납사원이기도 했었다.
퇴사하는 마지막 근무 때까지도 꼴찌에 가까운 순번으로 요금을 정산할 정도로
갓 입사한 신입사원만큼이나 손이 느린 실력이 없는 직원이기도 했었다.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을 하고, 청소를 부지런히 했던 이유는
업무적인 능력이 뒤쳐지는 나의 미숙함을 그런 면에서 보충하려는 나의 피나는 노력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당시 함께 근무했던,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고 지내는 동료들은
모범적이고 근면성실했던 직원으로 나를 기억 해주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의 나는 청소를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주부가 아닌 사람으로 살고 있으며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모범적인 주부 역할은 못하며 살고 있다.
근래 들어, 이런 저런 책들을 부지런히 읽게 되면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당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른 사람인 척 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게을러서 혹은
내 성질에 못 이겨서 그런 흉내를 내고 살고 있는 사람일 뿐,
실제의 나란 사람은 그다지 바르거나 착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