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80 시대 속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 보시겠어요?

2010. 9. 9. 06:00★ 나와 세상

 

 

 

 

읍내에 나가서나 볼 수 있었던 빨간색 공중전화기를 기억하시나요?

엊그제 결막염 때문에  작은아이를 데리고 학교 앞 안과에 갔었습니다.

저의 오래된 안구건조증으로 늘 다니던 안과인데 예전부터

70, 8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사진들과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는 교과서나

장난감들을 보면서, 볼거리로만 생각했는데 불현듯 이제서야 제 블로그가 생각났습니다.

 

 

 

 

 

 전화기들은 그 병원 대기실내에 직접 설치되어 있는 것들로 지금도 수화기를 들면

신호음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전화한통을 걸기 위해 읍내에 있는 전화국까지 30분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제 블로그 이웃분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정확히 1970년도에 태어난 사람인지라

70년대 후반부터 80년도 까지도 시골에서 자란 저도 그런 전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 이 분을 뵐 때마다 돌아가신 제 친정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웬지 제가 8살적인 1977년에 돌아가신 제 친정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 분을 독재정치가로 기록할런지 모르겠지만 전 종종 이 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친정아버지를 닮아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이 분의 대한 그리움은 한결 같습니다.

이런 저를 철모르는 무식한 아줌마라고 할지라도, 전  이 분과 작년에 돌아가신 대통령이  늘 함께 그립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가을 10월의 어느날,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던 철모르던 10살된

저에게도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분의 죽음은 너무 큰 충격이었으며,

제가 살던 마을 전체도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던 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마을회관에서 새마을 운동 노래가 흘러 나오면서, 마을 앞길을 빗자루질을 하고

개울가도 개량하면서 우리도 이젠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신 그런 대통령으로만 전 기억하고 싶습니다.

 

 

 

 역대 대통령의 영부인으로서는 가장 미인이고 고운분으로 기억되는 분이기도 했던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인자하고 포근해 보이시던. 어린 제 눈에는 그리 비쳐지신 분이었습니다.

 

 

 

 

 

 

 

 

 

 

 

 

 

 

 

 

 

 

 

 

 

이 안과에 들릴 때마다 나는 그 시간만큼은 늘 70년 대로 돌아가서 잠시 동인라도 추억에 잠길 수  있습니다.

저도 성인이 되서 몇몇분의 대통령들을 어른의 눈으로 지켜봤었고, 자세히는 알지 못해도 내 기준으로

판단을 하기도 했으며, 그 분들에게서 내 나름대로의 느낌이라는 것을 받았습다.

그들을 어떤 지도자로 기록할건지는 제가 할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 살았습니다.

그 분들의 업적과 비판 다 빼고, 평범한 사람으로 대통령으로 저에게 가장 친근하고 느껴지고,

우리나라와 우리국민들을  아주 많이 사랑했던 대통령으로는 두 분밖에 없었다고 제 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엔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은 혀를 찰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안다고 나불대는  정치?

니네들은 정말로  정치를 아니? 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운동하고 스포츠하고는 거리가 멀게 살던,  키다리 소녀였던 저도

레스링 선수였던 이 분의 경기는 손에 땀을 쥐며 시청하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박치기 한방이면 모두가 쓰러진다고 생각하며, 레스링도 다 짜여진 쇼였다는 것을

몰랐던 그 시대의 추억의 주역으로 레스링 선수였던  "김일"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을

시골 소녀였던 제가 제일로 꼽는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이런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부자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전화기 한대 있는 것 만으로도 부자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살았던  그 시대에는

자동차가 있는 부잣집은,  텔레비젼 드라마나 동화책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여고를 졸업할때인 1989년도까지도 전 이런 자동차가 있는 부자 친구는 단 한명도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주파수가 잘 맞지 않아서 자주 듣지 못했지만 가끔씩 운이 좋은날에는 라디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온게 신기해서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도 그 작은 라디오 속에

사람이 들어 있는지가 궁금해서 저희집에 있던 라디오를 죄다 분해를 해서 엄마에게

비내리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그 작은 기계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 게 너무 너무 신기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사진속 저 교과서들을...

영희야, 학교 가자!  바둑아 이리와!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국민학교 교과서들을.... 지금은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교과서들인데

이곳 안과병원에는 저런 책들이 원본 그대로 보관이 되어 있답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 누런빛이 도는 책장들을 한장만 한번 넘겨보고 싶었습니다.

 

 

 

 

 

 

 

 

 

 70, 80년 시대의 영화는 여고를 졸업할때까지, 학교에서 전체관람하던 영화를 제외하곤

단 한 편도 본적이 없는 범생이로 살아온 게 지금에 와선 정말로 많이 후회가 됩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전체관람하던 그 영화만으로도 전 충분히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로

지낼 수 있었으며, 늘 마음 속으로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을 즐겨하던 소녀였습니다.

아마 글쓰는 것을 조금만 공부를 했다면, 저의 대책없는 상상력으로 드라마나 영화 몇편 정도는

시나리오로 완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꿈을 꿔보면서, 영화 포스터들을 눈으로 즐기면서 봤습니다.

 

 

 

 명절이 되면 시골 우리집에 내려오던 총각이던 삼촌과 고모집 오빠들 손에 들려 있던 이 책자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였던 저도  애독을 했습니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두루 설렵하고, 남여상열지사가 적란하게 묘사되어 있는 애정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던 저 였음에도, 이런 잡지들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여기는 없지만 " 선데이 서울" 이라는 잡지도 그  친척오빠들 덕분에 명절에만 볼 수 있었습니다.

 

 

 

 

 분유라는것도 비싸서 자주 먹을수 없었지만 전 한참을 커서도 이 분유를 가루로 자주 먹었던 것 같습니다.

갓난아이때는 첫돌때까지 엄마 모유를 먹고 자랐고, 유일한 동네에서 한채 남아 있는 초가집에 살았음에도

그 가난한집 딸이던 제가 이 비싼 분유와 함께 엄마와 젖을 함께 먹을수 있었던 것은 제가 맏이라는

이유로 할머니의 첫손녀의 대한 지독한 사랑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서 그 돈으로 이 분유를 사서 할머니가 늘 동생들은 젖혀 놓고 첫손녀인 저에게만

먹게 해주셨다는 그 추억의 분유랍니다.

 

 

여기까지만 제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더 찍을것도 많았을런지 모르겠지만 환자분들의 시선을

의식하곤 어색한 사진쵤영하는 제 행동을 멈췄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것에 영 형편없다는것은 알고 있지만 블로그를 하면서 이런 모습들을

여러 블로그 이웃분들에게 보여드리면서 그 시절로 추억어행을 가보고 싶은 마음에 찍었답니다.

주시 오남리의 서울한빛안과 의원 원장선생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으며

이 촬영을 마친 다음 진료일에에 가서는 사진촬영에 대한 보답으로 저희집에  남아 있는

양주 샘플 두병과 안주 4봉지를 드렸습니다.

제 나이 또래로 보이시는 의사 선생님이신데 이런 많은 7,80년대의 사진들과 물건들을

얼마동안이나 수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이런일이" 라는 프로에서 제의를 받고도

거절을 하셨다는데 제게 이런 촬영을 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