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9. 15:58ㆍ★ 나와 세상
(제가 6살이나 7살때 사진으로 추정이 됩니다. 제옆의 긴머리 귀여운 꼬마는 저와 두살 터울인 둘째 동생입니다.)
요즘엔 초가집이라는것은 민속촌에나 가야 볼수 있는 집일것이다.
1970년에 전라남도 장흥이라는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도 교도소 앞 마을인 "원도리" 라는곳에서
자란 나는 그 시대에도 보기 힘든 초가집에서 쭈욱 성장했으며, 열아홉 여고를 졸업할때까지도 내가
살던 집은 가을때마다 백평이 넘는 마당이 있는 초가지붕에 새볏짚을 엮고 살아었다.
지금은, 이렇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그 지난것들이 추억이라는 단어로 남을수 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우리집이 초가집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으며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국민학교에 입학을 해서 가정환경을 선생님이 조사하면서 집이 기와집인 학생들 손들라고 하고,
집에서 텔레비젼이 있는 사람 손들라고, 전화기 있는 사람, 엄마가 없는 아이, 아빠가 없는 아이 등등,
그런 조사를 전체적으로 공개적으로 교실안에서 선생들은 손들어서 확인을 해서 한없이 초라하고 가난한
많은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주는 행동을 생각 없이 했었다.
텔레비젼도 없었고 아빠도 안 계신 아이로 나는 손을 들어야 했고, 집이 초가집인 사람 손들라고 할때도
창피한 마음으로, 수치스러움으로 이를 악물고 손을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 이름 金 保亨이라는 뜻엔 집안의 맏이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으로 그 가난한 집안에서
명석하신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하신 할머님이 유명하다는 작명가에게 돈을 지불하고 지으신 이름이라고 했다.
아들이 없는 딸만 셋인 우리집에서의 맏이였던 나, 전혀 명석하지도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는, 게으르고
한심한 맏이로서 쓸데없는 몽상만 하는 그저 그런 여학생으로 자라났으며, 비내리는 우리집 마당의 모습을
사랑하는 우유부단한 시골 여자아이로 성장을 했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을 하고 나서 한달 남짓이 지났을때 내 아버지라는 분은 나와 함께 한방에서 자다가
지병이시던 폐결핵으로 심한 각혈을 하시는 모습을 맏이인 나에게만 보여주신채, 눈을 뜬채 나를 쳐다보시다가
그렇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 세상을 등지고 가셨고, 세상에 나와 두 동생들과 서른 여섯된 나이에 과부가 된
내 친정엄마만 , 호랑이 같은 내 친할머니인 시어머니와 함께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
보따리 장사도 하셨고 그 일을 하면서 엄마는 천평되는 논농사에 250평정도 되는 논농사에 그리고 산으로 들로
나무를 하러, 나물을 캐러 가셔서 장날이면 할머니랑 나물이나 배춧거리를 가끔 내다 팔기도 하시면서
나와 두 동생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셨다.
(제가 9살적에 아버지 성묘를 동생들과 삼촌이랑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맏이여서,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셔서인지 할머니와 삼춘의 나의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었으며, 무조건적이었다.
명절때마다 내려온 삼촌은 결혼도 미룬채 친조카로서 첫조카인 나의 옷가지들과 학용품 일체를 새것을 사주셨
으며, 1979년도에 초가집에 살고 있는 우리집에 커다란 텔레비젼을 사서 설치해주셨다.
두 동생 또한 손녀이고 조카였지만 할머니와 삼촌은 늘 눈에 보이게 나의 대한 편애를 하셨던 분들이셨다.
여고를 졸업할때까지 명절때마다 단한번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를 데리고 가는것을
잊지 않으셨던 삼촌은 두 동생은 데려가도 그만, 안 데려가도 그만이었지만 나에게 늘 맏이니까 꼭 가야 한다고
훈육 하셨고 늘 간접적으로 나에게 이 집안의 제일 어른이 나라는것을 은연중에 세뇌를 시키셨다.
그리고 내가 집안 문중에서 어르신들이 의논을 하셔서 여자는 집안 족보에 올리지 않는법인데 내 아버지대에서
대가 끊기고 우리가 딸만 셋이고 아버지가 장남인탓에 여자인 나를 집안 족보책에 이름을 올리시고 새 족보를
만들었던게 아마 내가 중학교때쯤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아빠가 안 계셔서 슬프다는 생각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서너달동안만 느낄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내 기억속에 남겨져 있는 아빠의 대한 기억은 늘 기침과 가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병약한 모습과
나에게만은 유독 엄격하시고 회초리를 들고 글자 연습을 시키신 무서운 남자분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겨울엔 초가집 그 좁은 방에서 마당에조차 못나가게 했던 분으로 단한번도 웃는걸 보여주지 않으셨다.
성묘를 가서 아버지 묘에 절을 할때면 정확히 알 수 없는 복받친 감정마저도 아버지의 대한 애틋함보다는
그저 "아버지"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 때문이었을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없이 컸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대한 기억과 추억은 내게 남아 있지가 않았던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잘 생긴 미남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남겨진 사진으로도 분명히 멋진 외모를 가진분이셨다.
딱 한번 아버지를 선본 엄마는 아마도 잘생긴 아버지의 외모에 반했지 싶다.
돌아가신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는 아버지의 대한 기억은 전부 좋은것들만 가지고 계시며,
아직도 아버지의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계시며, 함께 산 세월이 길지 않아서인지 아버지의 대한 환상을
간직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늘 아버지의 좋은 기억들만 애길 해주신다.
초등학교 근처에 가지도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한글은 물론 천자문는 물론이거니와 공자 그리고 영어까지
독해를 하신분이고 너무너무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옛날 남자로서는 굉장히 자상한 남자였다고 ~~
아버지의 몇 안되는 기억중엔 아버지가 엄마를 향한 폭력의 대한게 한개 있는데도 말이다.
홀시어머니인 할머니로 인해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일이 있을때 아빠가 일부러 할머니 앞에서
엄마에게 그런 폭력을 휘둘렀다는걸 지금은 충분히 알 수가 있지만, 그당시 내 아빠는 병약한 남편이었을뿐이다.
나의 지나치게 메모하는 습관이 시작된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 스물살이 넘어서 내려간 시골집에서 내가 발견한
아버지의 두툼한 수첩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것이다.
아내의 대한 미안함, 병약한 자신의 대한 자책과 동네에서 면장인가를 맡고 교회 장로직을 맡으면서
그때 그때 짧막하게 적어둔 메모가 적힌 그 수첩을 읽고 나서 나는 새삼 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나의 뭐든 메모하고 적는 습관이 생긴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태어나고 두 동생들이 태어나는걸 밖에서 지켜보는 아빠의 마음도 아주 짧막하게 적어 둔 나의 아버지의
습관으로 큰딸인 나는 작가라는 얼토당토 않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병약한 남자였지만 굉장히 낭만적이고 문학적인 그런 분이셨다는걸 두 동생들은
몰라도 나는 이젠 알 수 있을것 같다.
병약한 자신으로 인해 늘 고생하는 내 엄마의 대한 애정, 홀시어머니의 대한 장남으로서 고뇌하는 그 짧은 글을
통해 나는, 뒤늦게 나의 아버지를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90년 저의 첫직장인 (주) 일화 맥콜회사에서 안내직을 할때 엄마와 동생 그리고 외삼촌과 함께 찍은사진)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모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두 동생과 함께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통역학원에서 일본어를 다니면서 반백수생활하다가 그곳에서 같은반 아저씨가 맥콜회사 안내직을 구한다면서
면접을 보고 나서 운좋게 취직이 되어, 서울 번동에서 경기도 용인까지 통근차로 출퇴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두 동생은 언니인 나와 함께 살수 있게 되고, 이모집에서 벗어날수 있다는것만으로 행복해했었다.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 가정부라는 직업으로 서울 강남에서 입주 가정부로 있던 엄마는
이때즘에 지금의 시골 아버지를 큰외삼촌의 소개로 재혼을 생각하게 되던 때가 바로 1990년이었다.
두 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엄마와 언니인 나를 위해 염광여상을 지망해서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둘째는 주간 학교를 다니면서 야간학교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면서도 용돈을 벌었고
막내 동생은 학교 매점에서 일을 하며 용돈을 벌기도 하면서 우등생으로 졸업을 했다.
둘째는 고3때 겨울에 농협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면목동 지점을 다니기로 되어 있었으며, 시험성적 또한
나중에 알려졌지만 당당히 1등이었다는것을 알게 될 정도로 두 동생은 기특하게 잘자라주었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두 동생들과 싸우기도 왜 그리도 싸웟는지, 나의 잔소리에 동생은 지겨워 했으며,
귀가시간, 그리고 술를 마시는 행위는 있을수 없는 짐슴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꺼리로 치부하는 큰언니인
나와 사는것을 특히 둘째는 힘들어 했으며, 두 동생을 훈육하기 위해 나 스스로도 밤10시 이전엔 귀가를 하고
두 동생에게는 밤 9시이전 귀가시간을 지키도록 했다.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분명히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여동생 둘과 우리 세자매만 살기에 더더욱 행동가짐에 조심을 시키는 엄한 큰언니가 되어야 했다.
(왼쪽 키작은분이 첫직장을 소개시켜주신, 일본어 학원에서 일어를 함께 공부하던분이고,일본인관광객과 한컷)
용인에 있는 일화를 출퇴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당시 내 월급이 30만원이 채 되지 않았으나 나에겐 아주 큰돈이었으며 그돈으로 두 동생 학비에도 조금은
보탬이 되었으며 자취생활을 하는 우리네 생활비로 충분했던것으로 기억된다.
새벽5시경에 일어나서 고등학생인 동생들 도시락을 싸놓고, 버스를 타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아침
7시 15분에 있는 회사 통근버스로 갈아타고 용인까지 출퇴근을 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내 나이 스물 한두살이었기에
지치지 않고 잘 버티면서 잘 다녔던것 같다. 그 안에서 함께 일을 하던 언니들과도 즐거웠으며 엄격한 규격화된
내 생활범위안에서도 충분히 20대의 충분한 유흥문화를 건전하게 즐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이트 클럽이라는곳도 회사 회식에서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고, 회사 차원에서 가는 야유회도 호텔로도 가보고,
전라도 촌년인 나에게는 모든것이 즐겁고 생소한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미팅도 수시로 했으며, 친척오빠들이 소개시켜주는 남자들도 무수하게 만나기도 하면서, 얌전한척 하면서
온갖 만남들을 주선도 하고 만남을 가지면서 나의 남성 편력을 두툼한 노트에 철저하게 기록하기도 하는 시기였다.
직업군인과 대학 복학생들을 가장 많이 소개 받았고, 나의 큰 키가 정점이라는것을 알게 해준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나름 청순하고 이쁜편이라는 착각을 하던 시기도 이 20대 초반의 나이였던것으로 기억된다.
항공회사 직원도 소개 받았고 제약회사 직원등등등 직업도 가지 각색이었으며, 내가 좋다고 맘에 든다고 우리
회사 전화번호만으로 찾아오는 남정네도 몇몇 있었으며, 낭만적인 멋진 글귀로 나에게 편지를 열심히 보내준
남정네들도 무수하게 많았던 시기였으나, 나는 웬지 그 남정네들에게 잔인해지고 싶어하던 스물살의 콧대 높은
아가씨가 되고 싶은 허영심에 한 남자를 진득하게 사귄다거나 해본적이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