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살이로 만나본 4명의 집주인들을 통해 본 결혼생활

2010. 3. 13. 06:52★ 나와 세상

 

 

 

 

내가 스물살이 되면서  여고생인 두 여동생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했었다.

서울 번2동에 있는 연립주택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지하2개짜리 방에서 우리

세자매의 자취생활은 400만원의 전세살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주인아저씨는  군에서 대령으로 전역한 50대 중반의 듬직한 인상좋은분이었고,

주인아줌마는 그시대에(89년도) 보기 드문 굉장히 세련된 외모를 가진 40대후반의 아줌마였다.

고등학생인 아들과 중학생인 아들을 둔 참 부부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분들은 창고로 쓰던곳을

개조를 해서 연탄보일러로 된 지하방으로 만든것을 늘 못미더워해서 수시로 우리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며, 무슨 불편함이 있으면 언제든지 애기 하라고 말했다.

그곳에서의 1년동안 자취생활을 하면서 그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에게 큰소리 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저 늘 허허거리면서 모든것을 그 주인아줌마 말을 너무

잘듣고, 자신의 아내를 좋아하고 있다 는것을 느낄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만 볼수 있었다.

(결론은 남편이 아내에게 잘하는 집이  잘 굴러간다는걸 거기서부터 배웠다)

 

 

 

 

지하방 생활의 어쩔수 없는 쾌쾌함과 눅눅함을 참지 못하고 1년동안 모은 200만원을

합해서 같은 동네 (동생들의 학교가 번동에 있어서) 지상1층의  방한칸 짜리집 이사를 하고,

우리 세자매의 두번째 전세살이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첫직장이 용인인 관계로 새벽5시에 일어나서 인근 염광여상을 다니던 여고생인

두 여동생의 도시락을 싸고 5시반이면 집을 나서서 강남 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강남터미널에서 회사 통근차를 7시15분에 타고 출근을 하는 고된 시간을 보냈다.

두번째 만난 주인집 부부는 자주 싸웠으며, 싸울때마다 아저씨의 폭력도 간간히

있음을 충분히 감지 할수 있어서 불안함과 두려움을 갖고 지내야 했다.

새벽마다 우유 배달은 하던 50대의 주인아줌마의 세파에 찌든 그 표정은

바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중년의 여인의 모습이었으며, 자식들을 위해 참고

살고 있음을, 스물한살이던 나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화장실이 불편했던 그곳에서의 생활에서 서울 생활 처음으로 아담이라

불리는 바바리맨들의 딸딸이 치는 모습도 볼수 있었고, 늦은밤 퇴근하던 길에

뒤따라오던 남자 고등학생에게 쫓긴 경험도 그 2번째 전세집에서 할수 있었다.

살기 위해 쉬임없이 일하면서 돈을 버는 아내, 그런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술주정뱅이의 남편의 모습을, 그곳 번2동 문간방 생활을 하면서 경험할수 있었다.

 

 

 

서울 묵동 이모집 주변으로의 3번째의 이사, 그로 인해 막내가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둘째는 농협공채시험에 합격을 해서 면목동 지점 여행원으로 취직이 되어 있었다.

나도 묵동에서는 아침 6시반에 본사 통근차를 타고 강남터미널까지 가서 용인공장

차량으로 갈아타면 되는 편리함을 경험할수 있었다.

성실함 빼면 시체인 우리 세자매는 두동생의 고등학교때의 장학금과

나의 30만원 남짓 되는 월급으로 저축을 한 돈600만원을 보태서

3번째의  이사를 그렇게 1200만원에 월10만원의 월세를 생전 처음 살아봤다.

그곳 주인아줌마는 함께 살지 않았다. 매달 직접 돈을 받으러 2층 우리방까지 올때나 볼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주인아줌마 말고 안채에서 전세로 살고 있던 젊은 부부를 만날수 있었다.

여잔 엄청나게 이쁘고 세련되고 키크고 늘씬한 그런 젊은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새댁이었고,

남편이라는 남자는 소도적놈 같은 인상을 가졌고 덩치도 엄청 좋아 보여서, 처음 그 남자

봤을때, 우리 세자매는 농담으로 그런말을 했었다. 와, 저런 남자한테 맞으면 뼈도 못추르겠다고.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서 가끔 안채에서도 그 남자의 폭력이 가해지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문하나를 두고 살고 있는 지라 그 부부가 싸울때마다

그 부부들의 다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늘 같은 이유로 싸웠다, 의처증이 있는 남편으로 느껴졌으며 매번 폭력을 행사하면서

어떤 놈이랑 붙어 먹었냐, 아까 낮에 전화할때 왜 전화 안받았냐고, 전형적인 의처증을 가진

남자의 특징들을 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자매들은 그럴때마다 무서워만 했고 감히 경찰에

신고 할 생각을 못했으며, 그 시대만 해도 부부 싸움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바로 태릉경찰서가 바로 뒷편에 있었는데도 신고할 생각을 못했다.

종종 그 이쁜 새댁의 멍든 얼굴을 볼수 있었고 거의 외출은 하지 못하는듯 했지만

일요일엔 늘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안고 아주 다정한 부부처럼 가족 나들이를 했다.

하지만 그 이쁜 새댁의 활짝 웃는 얼굴은 한번도 못본채 그집을 나왔다.

우리 세자매는 그 3번째 전세집에서 은행 다니는 둘째와 나의 직장생활에서 모은 돈으로

또 저축을 해서 2년뒤에 2500만원짜리 지상1층의 방2칸짜리 전세로 늘려 갈수 있었다.

막내동생의 취직도 그3번째 전세살이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4번째 이사, 같은 동네인 묵동 2** - ** 호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우리 자매 처음으로 방2칸짜리 도시가스 전세집에서 살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연탄불을 갈지 않아도 되고,

LPG가스 보일러로 한겨울 새벽에 갑자기 가스가 떨어져서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것과, 방이 2칸이고 거기다가 높은 1층집이라니.. 하면서 너무나도 우리

세자매는 행복해 했으며 그런 우리 세자매를 엄마와 이모는 너무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그집의 주인집 부부, 지금까지도 가장 좋은 주인 아줌마 아저씨로 기억되고 있다.

키크고 잘생긴 30대 중반의 주인아저씨, 아주 키가 작고 야무져 보이는 오동통한

30초반의 주인아줌마는 맞벌이를 하셨고 그 집도 직접 주인아저씨가 시공해서 

직접 지은 집이었고 그 아저씨는 건설업쪽 일을 하시고 있었다.

친구 같은 그런 부부로 보여졌고 내가 결혼을 해서 그 집을 떠나오면서까지

그 주인집 부부가 싸우는 모습은 단한번도 보지 못한것 같다.

그 당시 아이들의 나이도 초등학교 저학년 1명, 고학년 1명 아들 딸이었다.

참 이쁘고 성실하고 정 많은 좋은 사람들이라는게 얼굴에 묻어나던 부부였다.

그곳에서 동생은 지금의 제부와 데이트를 언니인 내 눈치를 보면서 했고,

스물네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맞벌이  부부가 되었다.

만화애니메이션을 일을 새로 시작한 막내, 그리고 용인 직장을 그만두고 

그곳에서 결혼전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된 작은사무실에서 경리일을 하면서

나도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1997년 2월달에 결혼을 해서 그 집을 나왔다.

그 4번째 전세살이를 하면서 만난 그 부부들의 나이가 딱 지금 내 나이즘으로 추정된다.

1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참 정겹고 좋은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그 부지런하고 친구 같아 보이던 그 부부가 정말로 보고 싶어질때가있다.

우리 세자매를 친동생처럼 보살펴주셨고 나와 동생의 결혼식까지 와주셨던 분이시다.

아마도 지금도 어디선가 이젠 성인으로 자란 두 자녀들과 참 행복하고 성실하게 살고 계실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