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13일날에 나는 다음 칼럼1호 글을 올렸다

2010. 3. 3. 07:30★ 나와 세상

 

 

 

2001년 어느 여름날 남편의 술값으로 인한 카드 남발로 치열하게 싸우던 그때에

격한 감정으로 홧김에 우리집에 나만을 위한 물건 한가지를 구입했었다.

그게 바로 백만원이 넘는 고가의 컴퓨터였다.(약132만원)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에서 자판 자음 모음을 찾아가면서 아이디를 만드는것으로

이 컴퓨터와 처음 마주 하게 되었다.

마우스를 잡고 이곳 저곳 클릭하는것도 쉽지 않았던 그시절에 나는 그렇게 컴퓨터를

남편의 무절제한 카드 남발에 대한 반항심으로 구입을 하게 되었던것이다.

당시4살인 보미와 2살인 혜미 두딸들로 인해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고 있던 내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이 Daum에 칼럼이라는것을 만들어서 "날마다 이혼을 꿈꾸며" 라는 제목으로

나의 눈물어린 하소연과 푸념들을 늘어 놓으면서 그렇게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하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칼럼의 첫글을 올린게 2001년 8월 13일이었으며 칼럼제1호의 제목은

" 사표를 서랍속에 넣어 놓고 다니는 남편처럼" 이었다.

그중에서 2002년 2월 22일 칼럼글 58호인 "이혼계획" 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오늘 옮겨본다.

 

 

 

 

2002년 2월 22일 칼럼글 58호   " 이혼 계획"

 

 

어느날엔가 꿈을 꾼적이 있다.

나와 남편이 이혼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산지 10년후의 모습이었다.

나란 여자는 우리나라 최고 통치자인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가장 신임받는

비서관으로 아주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울 남편은 불쌍하게도

청와대 앞에서 깡통을 들고 헌병들에게 쫓겨 나는 걸인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꿈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남들은 비웃겠지만

작년 언제인가 그런 꿈을 꾼적이 있었다. 보미와 혜미도 내가 키우면서

강남의 아주 고급 빌라가 밀집 되어있는 부촌 어딘가에서 친정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이는 우리 이쁘고 총명하게 자란 두딸들과 함께 나란 여잔 참,

곱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꿈속에서 보여지는 내 얼굴과 표정, 그리고 우리 이쁜 두딸들의 얼굴에서도

어두운 모습 따윈 전혀 찾아 볼수 없었고 나란 여잔 깔금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항상

공부하는 자세로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 남편의 술값으로 인한 카드건이 번번이 불거져 나올 때라 그런 꿈도 꿨을거다.

한두번도 아니고 번번이 그런 사고를 치니 차라리 이혼을 해서 나 혼자 당당하게

살아가야지를 속으로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라 그런 꿈을 꿨던 것 같다.





이혼?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적도 있다.

남편이 합의이혼을 해주지 않을 경우엔 어찌해야지 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이혼을 하기 위해 내가 만약에

소송을 한다 해도 난 그리 많은 위자료는 청구 하기도 힘들다는것도

법률사무소나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로 문의를  해서 알게 되었다.

전업주부였고 실제적으로 내가 남편의 카드대금을 해결을 한적이 많았지만

어딘선가 빌린것들이었고 남편이름으로만 빚이 있는 상태고 폭력은 없었고, 폭언은

심하지 않았으니, 남편이 고집 부리고 절대로 이혼할 생각 없다고,

잘못한거 인정하고 앞으로 열심히, 성실히 살겠다고

판사 앞에서 다짐 하는 말을 지껄일라 치면 아직은 그럴 경우 소송으로

가지 않은 이상은 법정에서도 웬만하면 이혼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합의이혼은 불가능할것이라는것을 예상 할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상상해본게 어느날엔가 남편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출근을 시키곤 남편 몰래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그 잘난 전세금을 털어  저어기 어디 지방으로

두 아일 데리고 전입신고도  하지 않은채

포장이사를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거란 생각도 해봤다.

낮에만 집을 보러 오라고 부동산에 당부한 다음에 손 댈 것도 없이

포장이사하면 하루종일 집보단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은

남편 몰래 전세금 빼서 이사 가기란 어렵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러가지 생각해 둬야 할게 있었다.

이사 비용이나 중개비 정도나 최소한 몇백 정도의 비상금은 챙겨야 한단

생각을 했고 그런 돈을 구하기 위해선 결제일이 되기전엔 남편 명의로

되어있는 카드 서너개의 현금 서비스를 이빠이 받아 챙긴 다음에 날라 버리는거다.

카드 서너개 현금 서비스를 한도 찰 정도로 서너개를 받는다면

하나의 카드로 받을수 있는서비스 금액이 250만만 쳐도 4개의

카드론 받을수 있는 현금은 천만원이 될거다.

그리고 서류상으로 이혼이 아닌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상납은 남편 몫이 되지 않겠는가?

너무 무서운 생각이라고 생각 할런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그동안 

쓸데 없이술값으로 날린 돈보다 적은 금액이고

나란 여자가 내 아이들과 살기 위해 남편에게 받지 못하는

위자료 정도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 하면서도 많은 부부들이 그러고 보면 진짜 돌아서면 남남보다 

못할거란 생각도 했고 한이불 덮고 살던 세월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마음이 멀어진다면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바로 부부 사이란 생각 절실하게 했다.

그래서 부부는 아주 가까울수도 있지만 아무 사이가 아닐수도 있어서

촌수가 없다는 무촌 사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세금도 너무 적고 나의 정신적인 동안의 고통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받지 않고  물러나려 생각하니 억울했다.

아니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돈이라도 많은 남자랑

결혼하지 않는게 너무 후회가 되었다.

남자는 그럼 그런 마누라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겠만 5년의 시간 동안

남편이 저지르고 다니는 실수로 아무 죄 없이

나란 여자가 받아야 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거란 생각을 했다.

법률 사무소에 전화하고, 국민고충처리 위원회 가정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하고도 전화통화를 해서 남편의 일을 애기하고 만약에 이혼을 하려 한다면

소송 한다면 승소할 확률이 내게 얼마나 있는지도 물어 봤을 정도로 작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즘에 가장 절실하게 이혼을 생각 해본적이 있었다.

그때 그 당담자왈, 심정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소송을 하면은 내가 승소해서 

위자료 받기는 힘이 들것 같다고 했고

이혼 사유로도 남편의 저지른 실수는 너무 약하다고 하면서 내게 묻더군.

남편이랑 진짜 살기 싫냐구? 아님 남편의 술값으로 카드건만 고쳐진다면 

살 생각 있냐고 묻더군.

그 물음에 대답을 선뜻 뭐라 할 수가 없더군.

그 담당자분 나이로 봐서 나이가 조금은 있어 보였고 법률공단 같은곳에서

전화상담하는 변호사쯤 되어 보였다.

그리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면서 조금 더 참고 남편을 다른 방법으로

조금 고쳐서 사는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한명도 아니고 두명인데 이혼해서 살 자신이 있냐고 묻더군.

작년 그때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구체적이이고 적극적인 방법까지

모색해 가며 이혼을 생각했던적이었던 시기였다.

그런 생각으로  살이 또 쭉쭉 빠지던 작년 늦여름에서 초가을이 오는

계절에 서른 두살먹은 내가 서 있던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