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수전노가 아니야

2014. 9. 29. 13:23글쓰기 공부, 연습

 

 

 

며칠 전,  일산에 있는 국립 암센터에서 정기검진을 받았다.  자궁암 진단을 받고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궁암 진료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고 주먹쥔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방사선 치료나 항암치료중인 다른 암환자들과 섞여 환자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은 아직도 생소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암센터에서 내 병은 가벼운 감기정도라서 이번 검진에서도 정상소견이 나오면 다음 정기검진은 1년에 한 번씩만 해도 될 것이다.

 

  작년 3월 봄이었다. 의료보험공단에서 실시한 건강검진에서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자궁경부암 소견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가 암일 경우엔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암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암 치료로 인해 내 가정에 미칠 경제적인

피해를 먼저 걱정 했었다.

  요즘은 흔한 병이 되어 암도 말기만 아니면 낫는다는데 그깟 자궁 하나 들어내는 일이 뭐 대수겠냐 싶었다.

여자로서 두 아이도 낳았고 중년의 나이도 넘겼는데 몸 안에 장기 하나쯤 없다고 사는데 뭐 그리 지장이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애써 담담하고 씩씩한 척을 했었다. 죠금은 두렵고 가슴 먹먹함에 울컥하기도 했지만 그러 감정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마누라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눈물부터 질질 짜는 남편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17년의 결혼생활은 나를 그 정도의 일로는 겁먹지 않는 씩씩한 아줌마로 만들어줬다.

 

  조직검사를 위해 자궁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푸른색 수술복을 입은 젊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앞에서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수술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려야 했다. 마취주사를 맞고 의식이 몽롱해져 가는 중에도 여자로서의 수치심과

두려움에 눈물이 맺힐 때 내게 위로가 되어준 것은 사랑하는 두 딸과 처녀시절 가입해 놨던 두 개의 보험증권이었다.

  조직검사 결과는 자궁상피내암이었다. 자궁암일 수 있다는 소견을 처음 내 놓은 여성전문 병원에서는 상피암도 자궁은

들어내야 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일산에 있는 국립암센터를 찾았다.암센터에서 2개월 간격으로 두 번의 검사를 해서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도받지 않아도 되고 자궁도 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재검 결과를 듣고 나서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며칠 뒤 저녁설거지를 하던 중에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내가 제출한 진단서와 그 밖의 서류들을 접수한 세 개의 보험사로부 진단금과 수술비 1,300만원이 입금되었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다 보험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확인한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물이 났다. 최소한 내 병 때문에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는 주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암 때문에 받게 된 보험금에 안도하고

기뻐하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창피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취업을 하지 않고 건강회복에만 신경써도 되겠다는

계산을 하는 내가 너무 참담했다. 돈이 주는 든든함과 위로가 이렇게 컸단 말인가? 생활인으로서 돈은 현실이다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나는 작년 봄에 사람이 아닌 돈 때문에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

 

 

 

 

 

 

  이외에도 돈에 관한 사연은 참으로 많다. 삼년 전 겨울, 새로 이사한 집 싱크대를 바꾸고 도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어머님이 넘어져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지만 2주일 정도 입원해서

치료도 받고 이런 저런 검사도 하시겠다고 했다. 큰 며느리인 나는 시어머님의 간병과 병원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제일 먼저 고민하게 됐다. 그래서 제일 먼저 했던 행동은 보험증권을 뒤지는 일이었다. 몇 년전부터 불입하다가 얼마전에

 해약한 어머님의 보험약관을 찾았다. 다행히 해약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번 병원비는 보장받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님의 첫 마디도 사고 흉우증보다 병원비에 대한 걱정이었다.

서글펐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시아버님 살아생전에도 당뇨로 인한 병원입퇴원을 수시로 하셨고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은 업보로 나는 아버님의 간병도 해야 했다.

며느리의 도리는 간병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병원비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을 자주 겪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돈을 밝히는 수전노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올해 들어 두 달동안 육아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해서 130만원을 벌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큰 아이의 입학비와 교복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를 했다. 고정 수입원인 남편 월급으로는 고정 지출이 아닌 경우에는 내가 단기 알바를 하거나 부업을 해서 충당을 했다.

간혹 목돈이 지출이 되는 경우에는 6개월 단위로 취업을 해서 그만큼의 빚을 상환해야 했다. 남편은 갈수록 돈에 악착 같아 같아지는 내게

속물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내가 이리 수전노로 변해가는 동안에도 남편은 여전히 돈에 있어 너그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남편은 알까? 나도 남편처럼 너그럽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돈, 살아가려면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나도 돈 아주 좋아한다. 부모 형제를 비롯한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도 돈은 꼭 필요하다.

돈은 부모에게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조건중에 하나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식을 키우는데도 돈은 필요하다. 마음으로 효도한다는

말은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도 옛말이 되었다. 사회생활에서도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고, 운동을 하는데도

돈이 필요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도 돈으로 먹고 사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다. 내 아이들은 돈의 위력을 모르고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나이가 들어 하늘로 갈 준비를 할 때, 나처럼 보험약관이나 뒤지는 속물이 아니라 어미 생각을 하면서 손 한 번 더 잡아주는

살가운 자식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천진스런 바램을 가져본다. 오늘도 남편은 돈 좋아하는 속물스러운 마누라에게 1억이 꼭 묶인 돈뭉치를

던지며 큰소리 한 번 뻥뻥 쳐보고 싶어한다.

 

 

 

 

                                                                                                                                                                           2014년 3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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