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5. 5. 03:38ㆍ★ 부부이야기
왜 내가 이렇게 사는걸까? 늘 이리 살았으면서도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데 늘 나만 손해보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왜 절망하고 혼자 분노하는지도 모른채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하루라도 살수 없는 내 천성때문이라고 말할런지 모르겠지만, 난 참,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자기만의 생활을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즐기면서도 깔끔하고 쿨하게 사는 그런 사람하고 나란 사람은 어울리지가 않는 사람인듯 싶다. 나를 아는 여러사람중에서 의외로 나란 사람이 성격이 둥글고 서글서글 하며, 털털해서 까다로운게 전혀 없어보이는 부드럽고 원만한 성격을 지닌, 그런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집착과 비슷한 모양새로 끊임없이 미련의 끈을 놓치 못하고 때때로, 수시로 절망하고 아파하면서도 그 순간을 지나면 나는 잊어버리고 만다. 사이사이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매순간순간에도 그래서 나는 불안한다. 그 순간순간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한조각의 불안함의 실체를 나는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몰라도 왜 내가 그런 짧은 순간의 행복함에도 불안함을 느끼는지, 다른사람 누구도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것 같아서, 애써 이제까지 어떤 사실,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바둥거렸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진실을 인정하고 나면 내가 잡고 버틸 끈이 한가닥도 남아 있지 않을것 같아서......... 그리 되면 내가 똑바로 서 있을수조차 없을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나의 선택은 나에게 적지 않는 절망과 죄절을 안겨다 주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나의 작은 자부심에 커다란 흠집을 내어주었고, 움츠려들고 한없이 작아진 내 자신만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따뜻한 사람인데, 라는 아주 작은 나의 자만심에 단시간에 치료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만들어주었고, 그 상처를 치료하기보다는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싸안기만 한 채 약을 발라 치료하기보다는 더 곯고 썪어들어가게 만들고 있다. 그 시간속에서 그나마 날 버티게 해주었던것은 늘 날 말끔하게 올려다보면서 끊임없이 날 필요로 하는 내 귀하고 이쁜 두아이들이었다. 모든 것은 나만의 문제였으며, 늘 내가 문제였다. 그런 오만가지 잡념들을 없애기 위해 나는 뭔가를 끊임없이 일을 하는게 내 건강에 이로울것 같았다. 밤까는 부업따위로는 내 아이들에게 해줄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욕심을 한번 부려보려고 밤까는 부업을 하면서 다른 부업 한가지를 병행해보려는 욕심을 부려보았다. 보여지는 내 인상과는 다르게 바느질에 머리 아파하는 나는 그래서 옷에 수십개가 아닌 백개정도는 되어보이는 구슬같은 단추들을 바느질해서 다는 일을 해봤다. 둔한 손가락은 아불 홑창 바느질하는것하고는 다르게 엉망으로 단추들을 달게 만들었고 한 벌 완성하는데 나만 네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러고도 잘못되어서 다시 풀어서 수포로 돌아갔고, 두 번째 옷단추 달기는 3시간이 걸렸지만 그것 또한 함께 그 일을 시작한 언니하고는 비교되게 안감 바느질이 엉망이 되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밤까는 일도 흥미가 없어지고 지겨워지기만 하고, 익숙하지 않는 바느질을 서너시간씩 걸려서 할려고 하니 머리가 터져 나가는것 같았고 잠잠하던 내 위장병이 도져서 어젯 다시금 동네 내과에 들러 약을 조제해야만 했다. 몸살끼가 겹쳤는지 밤까는 일도 어젠 11시도 되기전에 접었다. 매일 12시까지 하던 밤까는 부업도 힘들어하고 오늘은 보미 체육대회에 가르랴 오전시간엔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뜀박질을 잘해서 자기반에서 1등을 했다고 반대표로 달리기 대회에 나간다는 보미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학교에 갔었다. 전학년 이어달리기 대회에서 보미는 첫 번째 주자로 달렸다. 반에선 1등을 했지만 첫 번째 주자로 뛴 보미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다른반 친구에게 졌다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우울해했었다. 나는 내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라고 생각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도 나처럼 없을거라고 생각했었고, 날 닮아서 끈기도 없다고 내멋대로 단정을 해버리는 경향이 심했다. 내딸이 잘났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별로 없는 그런 엄마였다. 또래 친구사이에서의 내딸 보미는 내가 아는 내딸 보미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이집 재롱잔치때에도 느낀 그 느낌을 오늘 체육대회에서도 느꼈다. 날 절망과 좌절속에서도 버티게 해주었던 내두아이들에게 나는 아직도 커다란 기대를 하거나 집착을 하진 않고 있다. 집착하지 않기 위해 내 아이들에게 적당한 애정만 주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그러하겠지만 내 아이들도 내 자신보다, 세상의 그 어떤것보다도 소중하고 귀중한 내 귀하디 귀한 보물들이다. 근 몇 개월동안 더 어리광을 부리고 애기가 된듯한 작은아이의 모습에 내심 불안해하면서, 내가 내 아이들에게 애정을 듬뿍 주지 않아서 애정결핍으로 작은아이가 애기같은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로 변한것은 아닌가 반성을 자주 해보고 있다. 그에 비해 여전히 인사를 하는일에도 매번 어색해하는 내 큰아이의 모습을 보고 왜 그리도 둘은 다른 모습으로 커가는지 걱정이 많이 되기도 한다. 정직하고 바르고 그리고 자기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그런 강한사람으로 커주기를 바라면서 그런 사람으로 크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수 있는 부모가 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엄마이기도 하다. 자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문득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한 마음을 습관적으로 여기에다 또 긁적거려 보면서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