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아온 흔적들

2010. 1. 8. 00:11★ 나와 세상

 

 

 

 

1997년 2월 23일날 나란 여자가 모델처럼 멋진 몸매와 착하디 착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거라 착각을 한 서른 두살 먹은

노총각인 내 남편이, 똘마니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여자를 위해 온몸이 부셔져라 봉사할거라는 마음으로

(그땐 짐심이었을것이다)   나와의 결혼을 결심했을것이다.

이 세상 모든 남자들 다 믿을놈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남자는 내가 어릴때 동경하던 친정아버지의 대한 향수를 충족

시켜 줄수 있는 든든한, 그리고 영원히 여자라곤 나만 좋아하고 바라볼거라는 그 착각(?)과, 나 아니면 저 남자 폐인될거라는

착각도 함께 하면서 나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똘마니와 머슴 같은 남자의 마음을 믿고 결혼이라는 도박을 감행한 나였다.

 

 

 

 1999년도 가계부를 제외한 나의 13권되는 가계부는 우리 가족의 살아온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결혼 첫해부터 연도별 시댁으로 지출된 돈만 따로 작성을 했을정도로, 남편과의 부부싸움중에 튀어나온 말에서 우리집에

대체 해준게 뭔데? 라는 말을 듣고 못참아 하던 시기가 나에겐 분명이 있었고 그건 시댁에 대한 나의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결혼하던 첫해 시댁으로 들어간 경비가 4,306,000원이라는것, 그 이후에도 해년마다 철저하게 시댁으로 들어가는 경비와

친정으로 들어간 경비만은 철저하게 기록을 해서 보관을 했던 나는 그런 남편의 작은 지적에도 못참아 했다.

며느리로서 시댁에 뭘 그리도 대단한걸 했냐는식의 남편과의 부부쌈의 말에 가장 광분을 하던 아내였던적이 있었다.

2008년도 가계부도 얼마전에 기재를 마치고 이젠 년말 결산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집 경제사정은 여전히 좋은편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나날이 조금씩 빚이 줄어가고 있다는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할줄도 아는 주부로 변해있다.

 

 

  이젠 곧 열세살이 되는 내 큰딸 보미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와 약간은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지만 요즘 방학을 맞아

밤마다 잠들기전 엄마인 나와 수다를 떨면서, 아빠와의 연애 애길 들으면서 뭬가 그리도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 한다.

백일때 사진, 그리고 돌사진 그리고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니 보미가 벌써 13살이라는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못생긴 엄마와 잘생기고 멋진 아빠와 결혼을 한게 지금도 너무 신기하다고 말하는 보미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멋진 남자는 아빠라고 생각하며 친구들이 아빠보고 동안이라고 했다면서 너무 좋아라 한다.

허나 학교때 공부도 못하고 뭐 잘하는게 없다고 말해준 엄마를 가끔씩은 무시하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예전 편지같은걸

써서 상품 받은 재미로 수시로 택배기사가 우리집 방문을 자주 할때의 기억을 갖고 있어서,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작은상을 받을때도 떠벌리는 엄마로 인해, 작년에  담임선생님이 엄마가 쓴 편지 중에서 여성시대에 소개된 편지를

가져가서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엄만 글쓰는 하나만은 잘하는편(?)이라고 인정해주고 있다.

요리 만들기를 즐기며 저번에 사준 부츠와 실내화 정도는 저 스스로 빨줄 알며 동생을 위해 혹은 아빠를 위해

참치 넣고 김치찌게도 맛나게 끓일줄 아는, 거기다가 아직은 5학년이라 시험성적도 예전 나에 비하면 우수한편이다.

좀 소심하고 너무 내성적인편이라 걱정되긴 하지만 친구들도 많고 묵묵히 지 할일은 하려고 애쓰고 있다. (엄마 잔소리땜에)

 

 

 

생각만 해도 아직은 애기 같은 작은 딸 혜미, 여직 내게 "엄마, 난 다시 유딩(유치원생)되고 싶어!!"

라고 말하는, 찜질방 가도 지금까지도 1학년? 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키가 작은 작은딸이다.

보미와는 키에서만은 30센치 이상 차이가 남에도 그런것에 연연해 하지도 않고 기죽어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이쁜딸이다.

너무 이뻐라만 해서 버릇 없이 굴때가 있어서 지금도 매를 드는척은 하지만 보미와 다르게 혜미는 매를 때리기가 힘들다.

시험점수가 나빠도 전혀 기죽지 않고, 3학년 작년에 반에서 투표로 회장을 됏다는 애기조차 엄마에게 깜박 하고 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것에 욕심 없는 모습도 너무 이쁘고, 친구들이 엄청 많은것도 맘에 드는 우리 부부를 닮지 그 부분이 넘 좋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 외엔 다른 사람들에겐 지나치게 내숭을 떠는 게 영 걱정이 되긴 하지만 여자라서 그런지 그 내숭을

떨며 얌전한척 학교선생님들과 학원성샌님들에게 혜미는 여성스럽고 깔끔하고 친구들을 보살펴주고 자기일을 너무

꼼꼼하게 잘한다는 칭찬을 드는 일은 과히 나쁘지가 않다.

그런 선생님의 애길 들었다고 말하면, 허걱 ~ 하며 코웃음을 치며 자기의 내숭에 선생님들이 속고 있다고 깔깔거리는 모습

조차 애기 같아 보이니, 난 둘째 혜미에게만은 늘 너그러운 엄마가 아닌가 의심을 하기도 한다.

밥상은 차려주지 않으면 안먹는 나쁜 버릇이 있고 머리를 묶을때 잘 안묶여지면 신경질을 부리는 버릇도 있다.

시금치나 야채 같은걸 잘 먹지 않는다. 대신 인스턴트 햄이나 소세지 같은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고기를 좋아하고 친구랑 집에서 노는것을 좋아하는 이젠 열한살이 되는 초등학생이다.

 

 

 

나는 작년 여름즘에 고용보험에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전직장에서 받은 수상내역도 기재했다.

고졸에 자격증이라곤 운전면허증증 보통 2종밖에 없는 아줌마에게 너그러운 회사는 많치 않다면서 자신을 최대한

홍보를 할 수 있는 그런 이력서를 작성하고, 자기 소개서 쓰는것에도 신경을 쓰라는 애기를 들었다.

2001년도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치만 아주 가끔씩 내가 쓴글이 작은 책자에라도 실리기도 하고,

대한생명에서 주최하는 편지쓰기 대회에서도 장려상에만 그쳤지만 해년마다 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좋은생각이라는

책자의 1년구독권을 받은 기억에서부터 내가 조금씩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것 같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절정에 다달았을때 시작한 고속도로 톨게이트 3교대 직장은 나에게 여러가지들을

 경험하게 해주었으며 많은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주었던 직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젠 곧 나는 마흔 한살이라는 나이를 먹은 아줌마가 되고 그 나이를 감당할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러면에서 그 나이에 맞은 언행을 취해야 할것이고, 그 안에는 한남자의 아내로서 내조도 잘해야 하고, 두딸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존경 받는 엄마로서의 몫도 해야 할것이며, 시댁에도 며느리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도 해야 할것이며, 친정 엄마에게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나름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맏이의 모습을 보여드리여 할 것이며, 두 동생들들에게 그저 존재만으로

작은 든든함이 되어 줄 수 있는 큰언니가 되어야 할 것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런 친구인 보형이의

모습으로, 지인들에게도 보미 엄마로서 부끄럽지 않는 아줌마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 일기같은, 일상의 수필 같은  글모음집인 나의 평범한 블러그에 오랫동안 와서 댓글을 마음으로

달아주신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살아가는 애기에 관심을 가져주신 많은 분들에게도

예전과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좋은 이웃처럼 그런 평범한 아줌마 친구 같은 블러거로 남고 싶은 다짐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