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9. 08:12ㆍ★ 나와 세상
(오른쪽 안경을 낀분이 제 할머님이십니다)
엄마보다는 할머니에게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나였다.
어린시절 기억속엔 엄마와 한방에서 잔 기억이 전혀 없을정도로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 잠을 잤다.
아기때부터 늘 그렇게 할머니는 맏손녀라고 애지중지 날 키우셨고 딸이라고 날 구박하거나 하신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엄마에겐 정말 혹독한 시어머니셨지만 손녀딸인 나에겐 한없이 무조건적인 할머니었다.
손녀딸만 셋이라 서운해하시긴 했지만 그걸 우리 자매들에게 표현하신적은 없었다. 아마도 엄마에게는 표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할머니와 한방에서 잤고 할머니가 칫간(화장실)에 갈때도 할머니 앞에서 쪼꾸리고 앉아서 그 역겨운 똥냄새를 참아가면서까지
할머니 볼일 보는것을 쳐다보고 있을정도로 한시도 할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할머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그런 손녀였다.
초등학교 5학년엔가 한번은 자다가 두툼한 솜이불에 오줌을 싼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에게 맞아 죽을뻔 했던 나를
온몸으로 지켜주신 분도 내 할머니였으 며,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이 내 할머님이실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시면서 평생동안 일만 하셨고 동네에선 호랑이 할머니로,
깐깐하기도 하신, 그런 할머니가 무서워서 손녀딸인 나에게는 동네 남자애들조차 말을 걸지도 못했다.
한번은 내가 동네 남자아이가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아서 피가 난적은 있었는데 그 남자애는 우리 할머니에게 거의 실신할 정도로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며 그 남자 아이 부모님하고도 아주 크게 싸웠던적도 있었다.
가난한탓도 있었지만 나는 군거짓는 거의 안하고 자랐음에도 두동생들에 비해서 지금의 내 키가 170 이라는
장신의 몸을 갖게 해주신것도 손녀딸을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먹이시려는 할머님의 사랑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밥하고 김치 그리고 나물과 개떡를 자주 해주셨고 집에서 직접 재배한 콩나물을 수시로 먹었으며,
집텃밭에서 키운 각종 야채들을 직접 키운것을 먹고 자란탓에
나는 그나마 지금의 신체를 가질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도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수 있는 큰 주발그릇에다가 밥을 퍼서 먹고 자랐다.
도시락도 우리반에서 내가 제일 큰 양은도시락에 싸가지고 다녔으며 집에서 키운 닭이 낳은 계란도 나만 먹고 자랐다.
아마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공기로 3그릇은 될성 싶은 양의 밥을 먹었고 단한번도 밥끼니를 거른적이 없었다.
고3때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면 안방 아랫목 이불밑에 뚜껑 덮힌 큰 주발에 담긴 밥을 먹었고 그런 나를
본인도 입을 오물거리며,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잘못을 해서 할머니에게 꾸중을 들을때조차도 할머니가 나를 미워하는것 같은 느낌이나, 슬프거나 하는 해본적이 없엇던것은
큰손녀인 나에게 할머니가 그동안에 보여주신 사랑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꾸지람을 너무 우습게 알았던것 같다.
시골 할머님들이 대부분 그러한것처럼 내 할머니도 화가 날때는 욕을 엄청 잘하셨다. 나도 그런 욕들을 종종 듣고 자랐고..
"저 호랭이 물어갈 년!!" " 저 씹어 묵을 년!!!" " 귀신은 뭐하나 저런년 안 잡아가고.. 확 호랭이가 물어갈 년"
그렇게 심하게 욕을 하실때면 못된 나는 창호지로 발라져 있는 봉창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고 들어갔다.
"저..저.. 저 씹어갈년.... 늑대 말코 같은년!! 성질머리가 꼭 지 애미 닮은 년 ..!"
그렇게 나는 팔순 넘은 할머님과 단둘이 그 시골에서 나의 사춘기시절을 보냈다.
(아마도 이때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사진인것 같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즘에 엄마가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지만 할머니와 떨어져 살기 싫다고 고집을 부려서 나 대신에
둘째 동생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서울 이모댁으로 올라가 살기 시작했고, 그후 몇개월 있다가 막내동생까지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곤 중학교 1학년때부터 할머니와 단둘만의 생활이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시고방식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가장 많이 전해졌으며, 싫다고,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여자탓만 하는 사고방식이
싫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어른이 되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은 여자때문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것 같다.
손녀딸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이뻐해주셨지만 사고방식에서만은 우리 할머니는 옛날 이조시대 시고방식을 갖고 계신분이었다.
여학교때 그 시골에서 강간사건이 일어났을때도 늘 할머니는 그것도 여자탓이라고,,,, 왜 밤늦게 쏘다니냐고.. 늦게 쏘다니는 그 자체가
강간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말을 아무렇치도 않게 하셨고 그런 할머니에게 따지고 들면서도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정말 그런가..
여잔 그렇게 밖으로 나다니면 안되는구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잔 강간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가.. 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것 같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동안 12번의 방학을 할때, 대문 밖, 혹은 마을어귀 입구외엔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여학생으로 쭈욱 자라났다. 서울 고모댁에 가거나 공식적으로 친척집 방문외엔 난 그렇게 팔순 넘은 할머니랑 단둘이 지내면서
옛날 사고방식을 할머니의 생각을 거부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생각과 가치관을 그대로 이어 받았던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는 할머니들을 뵐때마다 옛날 날 그리도 이뻐 해주시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명절때마다 작은엄마와 엄마가 다녀가시고 나면 눈물을 짓다가도 며느리들 험담을 늘어 놓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나는 더더욱 결혼을 하고 나서 시어머님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며느리로서 도리에 더 집착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골에 내려가면 방에서 버선발로 뛰어 나와 달려와서
"우리 보형이.. 우리 보형이..왔냐,," 하면서 반가워해주실것만 같다.
이제까지 살아온 41년동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신분은 내 할머님뿐이라는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 그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뻐해준 사람은 바로 할머님뿐이라고..
친정엄마마저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적었고 결혼전까지는 엄마의 사랑보다는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사랑을 그나마 베푸는 사람으로 존재할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오늘은 유난히 7년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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