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체험이 된 친정나들이를 다녀오다

2010. 8. 30. 10:39★ 부부이야기

 

 

 

 

새벽 5시 35분에 일어나서 밥통에 밥을 해 놓고 찌게를 데워 놓고 나갈 준비를 했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최소한의 화장을 하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점검을 했다.

친정엄마에게 저번보다 얼굴이 못쓰게 됐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어젯밤에 밥을 많이

먹고 잤음에도, 얼굴에 살집이 보이지 않는게 신경을 쓰였지만 어쩔수 없었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친정 나들이를 해보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14년만에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엄마를 보러 가는것도 결혼해선 생전 처음있는일이었다.

 

 

 

 

집앞에서 버스를 타고  상봉터미널까지 50분까지 걸려서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 15분,

2천5백원짜리 퍼진 우동을 절반도 못먹은채 국물만 먹고 아침8시행 광주까지의 우등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는 고속버스안에는 금요일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승객이 6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라남도 광주까지 도착하는 내내 우등고속버스의 1인용 좌석에서 내내 졸면서 정오가 되기전에 도착을 했다.

 

 

 

 

 

집을 나설때만 해도 내리지 않던 비가 전라도쪽으로 내려가면서 밧방울이 굵어졌으며

광주에서 장흥까지 가는 직행 버스를 탈때즘엔 엄청난 많은 빗방울들을 뿌려지고 있었다.

광주에서 내가 태어나서 자란 장흥까지 가는 시간은 1시간 40분이 걸리는데

엄마가 계시는 영암까지는 1시간 10분정도가 소요되었으며,

영암 도착하기전 30분전인 12시 30분에 우는 목소리의 작은아이가 전화를 했다.

배가 아프다고, 언니는 6교시인데 저 혼자는 병원 못간다고~

몸은 전라도에 있는 엄마인 나, 보미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서 보미를 조퇴시켜달라고

부탁을 하고, 보미에게 혜미를 데리고 병원 다녀오라고,,,,,,

책상서랍에 만원짜리 한장 있으니 그걸로 병원 다녀오라고......

약먹이고, 혜미 배를 전기코드 꼽아서 따뜻하게 해 주라고,,

이제는 큰딸은 나에게 든든한 존재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도  가까이

있는 아빠에겐 전화를 안하고, 이미 전라도 끝자락에 와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

작은아이를 보면서, 그래 아직은 내 딸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영암에는 오후 1시 10분경에 도착을 했다.

 

 

                                

                              

 

20년전 엄마의 재혼으로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된, 영암이라는곳은 나에게 아직도 어색한 지역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 전라남도 장흥은 이젠 나에겐 어린시절의 기억들만 남겨주는 고향이며,

그곳에는 나와 연관된 집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도 영암 이곳으로 이장을 했기에

학창시절 친구들 말곤 장흥은이젠 나에겐  가볼수 없는 고향이 되고 말았다.

 

 

 

 

 

엄마의 이번 입원비만은 우리들이 내자고 상의하고 내려간 우리 자매,

저번 내가 받은 원고료(?) 20만원을 갖고 내려간 나, 엄마는 그런 딸들의

눈치를 알고 미리 오전중에 퇴원을 하셨다.

나는 고속버스를, 동생은 기차를 타고 왔으며 각자가 도착한 시간도 달랐다.

동생이 나중에 도착하고 우린 엄마의 몸빼 바지로 갈아입고, 무슨일이든지 좋으니

엄마 아빠의 일손을 도와드리기  오바를 하면서  설치기 시작했었다.

특히 동생은 엄마 아빠 허리 아프시니까 제발 좀 쉬시라고~

제일 처음 시작한 일이 창고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린 고추들을 꼭지를 떼서

비닐 봉투에 20근식 담는 일부터 시작했었다.

이미 밭에 있는 깨들도 우리들이 와서 벨까봐서 하루전날 미리 다 베어 놓으셨단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금요일 오후부터 우린 엄마 아빠와 함께 창고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수다들을 떨면서 고추 꼭지 따는 일부터 그렇게 농촌체험을 시작했었다.

 

 

 

 

 

고추꼭지를 따고 나서 엄마와 동생과 그리고 내가 간곳은 논둑가에 심어져 있는 토란대를 베러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그날 퇴원을 하신 엄마는 우리가 그렇게 극구 만류를 했음에도 이젠 괜찮다고 함께

토란대를 베러 가셨고, 낫짓이 서투른 우리들이었지만 그래도 세명이 하자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자전거에 토란대를 싣고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저녁을 먹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오전 3시간과, 오후 2시간을 토란대 껍질을 벗기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그렇게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토란대 껍질을 벗기는데도 하루해가 다 저물었던것이다.

우리가 친정에 있는 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서 우리가 내려간 고추를 따는 일을

못하게 될까봐 동생과 나는 초조해 했었다. 특히 동생은 본인이 시골에 내려온 보람이

없을까봐서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 토요일에는 밭에 심을 햇마늘을 손질하는것과,

토란대 껍질을 벗기는데 하루 시간을 다 보냈다.

새삼 느꼈다. 우리 딸들만 내려오니 이게 가능하지, 각자 서방들을 데리고 내려왔으면

그 서방님, 엄마에엔 사위가 되는 그들을 위한 상차림을 위해 절대로 이리 편하게

일을 하지 못했을거라는....

그러면서 우리 자매는 엄마와 아빠랑 종일 앉아서 수다를 종일 떨면서 깔깔댈수도 있었다.

서방도, 집에 두고 온 아이들도 모두 모두 잊고서,... 엄마집 묵은지 반찬에 게찌게 한가지만으로

우린 충분히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손자들과 사위들이 함께 내려 왔다면 울 엄마, 그들을 위한 상차림을

위해 하지 말라고 해도 시장가서 사위들 먹일 먹거리들을 사오셨을것이다.

 

 

 

일요일 아침, 엄마가 외할머님 생신때문에 새벽에 아빠와 함께 쌀40키로를 싣고 외갓집을 가셨다.

동생과 나에게 비내리니 절대로 고추 딸 생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면서...

동생과 나, 가는 비를 맞고 아침9시경에 고추밭으로 향했다. 우비를 입고서...

우리네들이 따지 않으면 두분이 또 저 넓은 고추들을 따실것이고, 이미 따시고도

또 새로 익은 고추들이 이리 많으니... 그렇게 우리 자매는 엄마 아빠의 하루 일손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비옷을 입고 아주 열심히 엄마 아빠가 오시기전까지 열심히 빨간고추들을 땄다.

왜 그리도 고춧밭은 넓은지... 이 밭 말고도 또 있다고 하니... 아마 우리 자매,

고추를 그리 오랫동안 5시간동안을 고추를 따본것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일것이다.

자전거에 고추 한푸대를 싣고 가다가  동생이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

리어카를 끌고 온 동생, 나와 동생은 그 리어카에 우리가 열심히 딴 고추들을 싣었다.

 

 

 

 

우리가 고추를 다 따고 리어카를 끌고 갈 무렵, 부랴부랴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다.

하루 일손은 벌었다고 미안해하시면서도 좋아라 하시는 아빠의 표정에 작은 보람을 느꼈다.

자전거와 리어카로 싣어 나른  고추는6푸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빨간고추들은 전부 딸수 있었다.

그렇게 동생과 나는 생전 처음 5시간을 넘게 물한모금을 마시지 않고 아주 열심히 고추밭에서 일을 해볼수 있었다.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그동안의 고춧가루와 그밖의 모든 먹거리들을 감사하다는 마음은 가졌으나

이리 힘들게 일하셔서 보내주신거라는것은 그저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철없는 딸년들이었다.

앞으로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이런 먹거리들의 대한 마음을 가질것 같았다.

그리고 일하는 내내 나는 블러그를 통해 알게 된 경빈마마님을 마음속으로 많이 생각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친정엄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셨다.

두딸년들이 생전 안하던 하루이틀 해본 농사일로 집에 올라가서 몸살이 날까봐서..

나와 동생도 이젠 아줌마라는것을 전혀 모르시는 분처럼...

안스러움과 미안함이만 가득한 울 엄마~ 엄마는 왜 그러실까..

엄마랑 아빠는 매년 하시는 일이시면서 두딸년들이 하루 이틀 한 그 일때문에

몸살이 나지 않을지 그 걱정 때문에, 점심을 먹는 내내 뭣하러 했냐고..

엄마 이젠 허리 괜찮아졌고 통원 치료 받을거니 걱정안해도 된다고...

병원비 보태시라고 드린 20만원도 기여히 돌려주시고 아빠도 마음만으로 충분히 고맙다고 하시면서,

아직은 엄마 아빠  그정도 능력 있다고. 극구 거부 하시는 모습에 왜 그리도 나는 가슴이 아프고

이런 모습하고는 늘 반대의 모습을 연출하시는 나의 시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내 서방과 동생 서방에게도 전화로 마누라들 빌려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엄마 모습에도 화가 났다.

동생과, 나, 둘다 큰며느리로 존재하고 있다.

나름대로 시댁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내시어머님, 내가 시댁 가서 하는 일로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 하시진 않는데..

 

 

 

 

돌아오는 길에 동생은 엄마집 전화기 밑에 봉투를 넣어두었다.

나는 엄마에게 드렸던 20만원중 10만원을 강제로 돌려받았다.

친정집에 다녀오면서 달랑 가방 한개만 들고 온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참기름 한병과, 참깨 봉지 하나만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부터  내가 내 엄마 아빠를 챙기겠다고~

한달에 한번이 아니더라도, 이번처럼 나 혼자만 친정에 다녀오면서 하루동안이라도

엄마 아빠 일손을 도와드리겠노라고..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말도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다.

다음번엔 딸들도 데려 갈수 있으면 함께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 두분이 하시기엔 너무 벅찬 40마지기가 넘는 논농사와

수천평이 넓은 밭농사도 내년부터는 제발이지 그만 두시라고  나보다 동생이 더 강조를 하고 돌아왔다.

우리네들도 자식들이 매달 10만원씩 부쳐드리겠다고 그러니 이젠 힘든 농사일 그만 내놓으시라고~

어렵지 않는 일이었음에도 이제까지 늘 마음만 있었던 나와 동생, 돌아올때도 서로 다른 교통편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자매들이라도  좀 가까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동생과, 나, 이제까지 그 큰며느리라는 타이틀 때문에 늘 시댁에만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이젠 우리가 엄마 아빠를 챙기자, 남편들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자고~

며느리 노릇에만 전전 하지 말고 우리들의 딸노릇도 좀 하고 살자고 결심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전혀 몸살이 나지 않았으며, 남편을 대함에 있어서도 전과는 다르게 행동할것도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어제 오후 5시 10분행 고속버스를 광주에서 타서 밤 9시 10분에 상봉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마중 나오겠다는 뜻을 아이편에 비친 서방의 청을 거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밤 10시 30분에 도착을 해서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엄마는 나 몸살나지 않았냐고, 김서방과 아이들 안부를 묻는 엄마의 목소리에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울 엄마, 나에게는 가슴 저리는 이름이다.

이렇게 나의 결혼 14년만의 생전 처음 나 혼자만의 친정나들이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