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 갈 때는 빈손으로, 올라 올 때는 양손 가득한 친정나들이

2010. 10. 21. 06:00★ 부부이야기

 

 

 

 

 친정에 내려가는 날이면 저는 늘 가슴이 설레이고 며칠전부터 들뜨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새벽4시 50분에 일어나서 김밥을 서둘러 싸다보니, 김밥 옆구리가 터지고, 유부 초밥도 다 뜯어지기도 했습니다. ^^*

전전날밤의 숙취로 피곤한 서방님을 6시가 다되서 깨우고, 잠이 덜 깬 딸들도 깨워서,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빈 김치통 4,5개와(12월초에 김장하러 갈 때를 대비해서) 동네 언니가 사준 포도 한박스를 싣고

친정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1년에 한 두번이나 내려가던 친정이었는데 올해는 벌써 세번째로 친정에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2월초 김장 할 때도 저 혼자만 내려 갈 계획이니, 저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쁩니다.

친정 내려가는 길에,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뒷모습은 아주 아름다워(?) 보이기 까지 합니다.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한번 쉬던  휴게소,  시골에  친정에 내려가면서 아이들의 군것짓을 없애기 위해

김밥과 과일을 준비했기에, 아쉬워 하는 아이들의 간절한 눈길을 나는 끝까지 모른채 하는 엄마가 되었다.

최고속도 160키로로 달린 서방님의 운전으로 주먹을 움켜쥔채 긴장하다가 졸다가는 반복한지 4시간이

넘는 시간을 넘게 달려,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 도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추수를 끝내지 못한 논들이 더 많은 듯 했고, 군데군데 벼들이 쓰러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비가 너무 자주 와서 엄마, 아빠가 쌀들이 별로 안 좋을 것 같다고 걱정을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내려간 날에 벼들을 벤다고 엄마께서는 그 날, 벼를 베는 인부들 새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즘은 농촌도 기계화가 되어서, 벼도 자동으로 베고, 그 벼들도 자동으로 탉곡이 되어서

차를 이용하여 벼를 말리는 기계로 옮기는 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제가 차를 타고 새참을 들고, 벼를 열심히 베고 있는 분들이 일하고 계시는 논으로 향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기여이 저희차를 타지 않으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논으로 가셨습니다.

 

 

 

 

 

요즘에는 벼들도 옛날처럼 낫으로 베는게 아니라, 이렇듯 기계들로 자동으로 추수를 한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추수때는 이 기계를 예약하기가 힘이 들어서 하룻동안 추수를 다 못하고

몇번에 걸려서 한 마지기당 (200평이 한 마지기입니다) 3만원을 받는 다고 합니다.

저희가 내려 간날에는 1,600평(8마지기죠)의 논의 벼를 수확 했다고 하셨습니다.

 

 

 

 

벼를 벤 기계에서 벼들만 이렇게 따로 분리가 되어서 자동차 뒤에 부착되어 있는

탱크 같은 곳으로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참 옛날에 비하면 우리네 벼농사도 많은 발전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그 자동차 뒷탱크에 저장되어 있는 벼들을 이렇게 또 벼를 말리는

기계속으로 이동을 해서, 자동으로 기계안에서 벼가  건조된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은 엄마가 살고 계신 시골의 모든 농가에 이런 건조기를 들여 놓치는 못하고 있지만

이 건조기로 인해, 추수 때마다, 아스팔트 도로위에 벼들을 펴놓고 일일이 푸대자루에 넣고

다음 날에 또 말리고. 지나다니는 자동차 바퀴에 깔리는 일은 없어졌다고 하십니다.

벼들을 말릴 때마다 폈다 담았다가를 반복하고, 손으로, 갈퀴로 뒤적거리는 것도 하룻동안

몇번씩 하는 것도하지 않아도 되니, 옛날에 비하면 지대한 발전을 한 거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연세가 있으신 노인 두분이 지으시기는 버거운 농사일인 것은 변하지 않는 듯 합니다.

 

 

 

 

 

자동차 탱크에 남겨져 있던 벼들은 이 기계안으로 옮겨져서

적당한 수분을 유지한채, 몇시간에 걸쳐서 건조된다고 합니다.

이 기계 안에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벼의 양은 1,800평까지라고 합니다. (한마지기가 200평이랍니다. ^^*)

그렇게 건조된 벼들은 푸대자루에 담아져서 창고에 쌓였다가 쌀로 탄생이 된다고 합니다.

대신 이 기기안에서 말릴 수 있는 벼의 양은 정해져 있기에 하룻동안 모든 벼들을

다 말릴 수는 없으며, 이 기기 또한 많은 농가들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다른 농가들의  벼들로 말려 줘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벼를 말려주는 데  한 마지기당 2만원씩을 받는다고 합니다.

 

 

 

 

 

 

 

 

 

 

 

 

 

전 가끔씩 가을즘에 이렇게 추수가 끝난 듯한 논에 나뒹굴고 있는  하얀천으로 씌워진 두루마리들은 뭔지 몰랐습니다.

볏짚들이라고 합니다.

그 볏짚들은 물기와 먼지들이 더 묻게 이렇게 천으로 말아서 나중에 소의 여물(먹이)로 사용한다고 하네요.

 

 

 

 

 

 

 

 

 

 

 

 

 

 

 

 

 

벼들이 건조기 속으로 들어가 몇시간동안 시쓰러운 소리를 내면서 건조되는 동안,

동생 가족들과 저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엄마는 저희들을 위해 미리 삼겹살과 어느 친척분이 보내주신 돼지비들을

냉동실에서 꺼내 놓으셨고, 제부와 남편은 열심히 너덜너덜한 양동이 같은 곳에 담겨져 있는

참숯불로 열심히 고기를 구워 아이들을 먼저 먹이고 소주 두 병을 두 남자가 함께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엄마에게 사위와 외손주들은 손님으로 존재해서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번 8월 말 처럼, 저와 동생, 이렇게 딱 두명의 딸만 내려가야지 엄마도 편하지 그렇치 않으면

엄마의 일거리만 더 많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보성 참꼬막과, 목포 산낙지를 장날에 못샀다고, 두 사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몇번이나 하십니다.

엄마의 그런 모습 보면서 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주는 시어머니는 별로 없는데, 며느리 좋아하는 음식 못샀다고

미안해 하는 시어머니는 별로 없으시던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네 아이들 모두 할머니 집에 자전거를 타고 온 아이들 처럼

자전거 타기에 열중 하기 시작하더니, 시골의 논과 밭으로 다니기 바빴습니다.

 

 

 

 

 

 

저희집 작은 아이 11살과 동생네 작은 딸내미 10살은 그 우와중에도 스티커 놀이에 아주 열심입니다.

시험이 끝난 동생네 아이들은 여유로운 대신, 저희집 두 딸들은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간간히 작은방에 들어가서 문제집을 푸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긴 해도 시험 기간이라는 것이 조금은 부담감이 있었나 봅니다.

 

 

 

 

 

작은아이들은 아직 어른들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관계로 둘은, 둘만 어울려서 자주 걸어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언니, 오빠들 만나면 아양을 떨어서 자전거 한번 씩 타고 말이죠. ^^*

 시골에 오니 아이들 표정이 한층 더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미는 그래도 컸다고 할머니를 도와 엄마와 이모와 함께 양파 손질과 마늘 손질 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1학기때까지 요리사가 꿈이라고 말하던 보미는 지금도 요리 하는 것을 저보다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날 다듬었던 채소들은 다음날 올라올 때, 동생과 제가 챙겨올 것들이었답니다.

직접 밭에 가서 뜯어온 싱싱한 것들이었습니다.

 

 

 

 

 

 

 

배추 값이 안정되었다고 했지만 아직도 불안한 마음에 엄마와 함께

이번 김장을 하기 위해 심어 놓은 배추 300포기가 심어져 있는 밭에도 가 봤습니다.

이번 저희 가족들 먹을 배추들은 걱정 안해도 된다고 엄마가 미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올 김장때도 동생과 저만 시골에 내려가서 김장일을 도와드릴 계획입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까지 네 아이들의 자전거 타기를 계속 되었습니다.

소주를 드신 제 남편님은 한두시간 주무시고 나선 마을어귀를 어슬렁 어슬렁 돌아댕기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술을 깨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밤에 볏자루 짊어지려면 술이 좀 깨야 하니까요....^^*

 

 

 

 

건조를 마친 벼들을 자루에 담는 작업은 밤 8시 반이 넘어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저울로 정확히 40키로씩을 달아서 제부와 남편이 부지런히 들쳐 업고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동생도 짊어지고 몇포대기를 옮겨 봤습니다.

40키로 자루를 보미가 잡고 있는 길다란 기기 위에 올려 놓으면 등에 들쳐 업기 편하게

어깨 위치 까지 자동으로 벼가 담긴 자루가 올라가니, 이건 일도 아닙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동생의 아들 내미에게 들어 보라고 동생이 시켜서 휘청거리면서

선호(동생아들)가 너댓번씩 창고로 자루를 옮기는 것을 했고, 보미는 들려진 40키로 자루는

들쳐 업기 편한 위치로 올라가게 하는 기계 작동 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흠.... 은행권에서 근무하는 제부와, 간간히 술짝을 나르는 일을 하는 제 남편이 좀 비교가 된다고

동생이 제부의 즒어지는 폼이 어째서 불안하다고... 조마조마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기운이 더 난, 제 서방님은 더 번쩍 번쩍 들어서 뛰면서 볏자루를 옮기더군요. ㅎㅎㅎ

저와 동생도 몇 번이나, 40키로 자루를 등에 업고 옮겨봤지만 역시 더희 자매도 농촌 출신이라서

그 쯤 40키로 짜리 자루즘은 거뜬 했는데, 제 남편의 억지스러운 만류에 몇번 못했답니다.

 

 

 

 

 

 

하룻동안 옮긴 볏자루들이 생각보다 많치가 않았습니다.

100포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도착하기 전, 오전중에 이미 한 차례, 친정아버지가 쌓아 둔 것이 있었습니다.

사위들 덜 힘들라고..... 사위들을 부려 먹기는 아직도 너무 어렵기만 하신가 봅니다.

 

 

 

 

창고로 옮겨진 볏자루들을 열심히 세고 계시는 아빠, 이 날 딱 하루, 벗자루를 짊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볏자루들을 더 많이 옮기셔야 합니다.

올해 비가 자주 내려서 쌀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농협에 매상을 할 때, 몇등급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고 성묘를 갔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묻혀 계신 산소와 그리고 지금의 아빠의 전부인이 묻히신 산소와,

지금의 친정아버지의 부모님의 산소까지.....

엄마와 지금의 아빠가 돌아가시면 묻힐 땅 까지,현재 밭농사를 짓고 계시는 밭옆에

산소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따로 체험 학습이 필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도시에 갇혀 사는, 아니 저희 가족이 사는 곳도 시골이라 할 수 있음에도

엄마집에서 볼 수 있고, 체험 할 수 있는 것들은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아이들은 시골 할머니 오는 것이, 너무 멀어서 싫다고 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할머니집이 없어서 불쌍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의 풍경이라고 해도 별 것 없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게 그런 평범한 풍경들도

제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또한 블로그를 하고 나서 생긴 증상 중의 하나이지 싶습니다.

저도 종종 이런 많은 사진들이 있으면 옆의 스크롤 막내 쭈욱 내려 볼 때도 있었지만

제가 사진을 찍을 때는 그런 생각 안하고 열심히 담아봤습니다.

 

 

 

 

 

성묘를 다녀와서 이제는 올라 갈 채비를 하면서 저와 동생은

쌀자루 40키로 짜리를 시작으로 각자의 자동차에 열심히 짐을 퍼다 나르기 시작 했습니다.

이번에는 친정 갈 때는 들고 간 것도 없었고 포도 한 박스가 전부 였는데도

엄마는 얼마전에 제가 보내드린 사과 한박스도 있다고, 기름 값이랑 톨게이트비  걱정을 하십니다.

저희 자매들의 차 뒷좌석에 푹 내려 앉을 정도로 많은 짐들을 싸들고 왔습니다.

 

 

 

 

들고 온 것들이 너무 많아서, 매달 시댁에는 30만원씩 자동이체가 되는데 왜 친정엄마에게는 1년에 한두번이나

드리는 돈에 매번 거절만 하시는 건지.... 그 마음 때문에 이번에도 10만원을 드렸지만 여지 없이 몇번이나

엄마와의 실갱이를 하고, 아빠의 야멸찬 거절로, 시골집을 나서는 그 순간에도 우리 자동차 안으로

밀려 들어온 꾸깃꾸깃해진 지폐들로, 저는 다시 한번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을 머금어야만 했습니다.

이 돈으로 니그들, 빚이라도 한푼 더 갚아라~~~~ 하시는 엄마 아빠 말씀에 또 목이 매였습니다.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 제 두딸들이 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는 맨날 맨날 돈 안받으시냐고,

서울 할머니는 한번도 거절 안 하셨는데.... 라는 말로 제 가슴을 다시 한번 후려 쳤습니다.

 그러시고도 저 모르게 두 딸들에게 용돈을 만원씩을 들려주셨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젤로 먼저 한게, 다른 카메라에 담겨져 있던 사진들 몇장만 제가 뽑아주고, 

두 아이들에게 체험 학습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두 아이 모두가 현재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참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토요일이 학교에 가는 날이었던지라 그날 결석을 한 것에 대한 체험 학습보고서를 작성해야한 했기에.....

그리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드리고 시골에서 가져온 것들을 그릇에 옮겨담아서 정리를 했습니다.

 

 

 

 

 

 

 

친정 부모님들로 인해 올 가을에도 풍성한 가을날의 먹거리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나무 농사가 안되서 올해는 감을 못보내주신다고 안타까워 하시는 부모님이셨습니다.

저는 늘 생각만 하게 됩니다.

저와 남편이  나중에 제 두 딸들에게 지금의 친정부모님 같은 마음으로 베풀기만 하는

친정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