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꼭 챙겨야 하는건가?

2013. 1. 9. 06:00★ 나와 세상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엄마의 생일을 챙기는 딸은 아니었다.

두 동생들과 서울에서 자취생활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엄마의 생일이면 전화 한 통과 얼마간의 용돈외엔 따로 챙겨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내 생일날 케익을 잘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생일날이면  미역국을 끓여주셨고 특별식인 라면을 여러개 끓여주셨다.

그게 열아홉살 생일때까지 내가 받았던 생일 선물의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고 생일이 뭐 특별히 챙겨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물살부터 동생들과의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의 생일을 챙기는 사람으로 변했다.

엄마를 비롯한 할머니 그리고 고모님들과 고모부님이나 작은아버지는 물론, 가까이 사시던 이모부와 이모님

그리고 이모부의 아들인 조카의 생일까지 다이어리에 기록을 해서 챙기는, 집안의 맏이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와 20대를 함께 했던 친한 친구들의 생일도 그 때부터 챙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나의 습관적인 기록과 메모하는 습관이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는 스물살 때부터 생일날에 케익을 자를때도 있었고, 선물이라는 것도 받기 시작했었다.

 

 

남편이 아들이고 장남이라서 귀하게 키우셨다는 시어머님의 말씀의 의하면

남편이 장가 갈때까지 손수 집에서 수수팥떡을 하시고 생일을 챙겨주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실상 남편의 말은 달랐다. 미역국외엔 자신의 생일을 챙겨 받은 적은 없었다고 했다.

 

결혼전 남편은,  자신의생일날이면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랑 술이나 진땅 마셨지

생일을 챙기거나 남의 생일을 챙겨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부모님의 생일이나 동생들의 생일에도 용돈 준게 전부였지, 가족들의 생일을 챙기는 자상한 아들도 오빠도 형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남편의 생일은 귀한 날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님의 명령 때문에 남편의 생일날이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몸을 정갈하게 한 다음

3가지의 나물과 3가지의 과일과 수수팥떡에 미역국과 새벽에 새로 한 밥에, 쌀이 가득 담겨져 있는

공기그릇에 초에 불을 붙이는 행사를, 며느리였던 나는 결혼 10년차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했었다.

홈드레스까지 입고 맨발로 있으면 안된다고 해서 양말까지 챙겨 신고, 새벽 동트기 전에

남편의 생일상을 차리고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짓꺼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했었던 것이다.

하늘 같은 시어머님이 남편이 결혼하기전까지 본인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리 해주셨다고 해서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아내가 된 나는, 남편과 지지고 볶으면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그 행사를 거르지 않고 했었다.

 

 

최근의  남편 생일상은, 저녁에 미역국에 불고기 재우고 다른 반찬은 보통날과 다를게 별로 없다.

남편 생일상을 새벽마다 차리는 것은 결혼10년차에 끊었고, 그 이후에도 한 해 걸러 간혹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게 보낸다. 대신 남편의 생일 선물만은 꼭 챙겨준다. 남자들이 의외로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삐질 수 있기에..

결혼1년 되던 해를 제외하고는 어머님이 남편의 생일이나 내 생일을 기억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누들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엄마와 동생에게는 매년 남편의 생일전날에 내가 통보를 해준다.

사위, 형부 생일날 전화 한 통 해주라는 당부를 하는 딸과 언니가 된다.

막내 동생은 내가 챙기지 않아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와 남편 생일은

물론 내 두 딸들의 생일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챙겨줬다.

 

결혼16년동안 시어머님의 생일을 까먹거나 그냥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부부에게 그 어떤 큰 시련디 닥치거나 고난이 있어도 어머님의 생신은 국경일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냥 넘기 적은 없었다.

친정엄마인 내 엄마의 생일은 지금도 전화 한 통과 용돈이 전부이고 용돈도 시어머니의 2분의 1이다.

환갑과 칠순때만 친정엄마의 생신날에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은 내 마흔 세살의 생일이었다.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역국도 없었고 친정엄마와 동생들의 전화 한통씩을 받았다.

 

친정엄마에게 말했다. 내 생일은 내가 축하 받을게 아니라 나, 낳르랴 엄마가 고생한 날이라고,

첫 아이라서 힘들게 낳르랴 고생 많이 하셨다고, 미역국은 엄마가 먹어야지.. 라고 했다.

동생이 생일 안 챙기냐고 하길래  귀찮다고 오늘 니네 형부랑 남양주 가야한다고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오전에 남양주에 갔다. 남편의 조기축구와 나의 바람쐬기 작은딸의 옛날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했다.

남편은 남양주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에 쌓인 눈까지 치운 다음에 2시부터 6시까지 축구를 했고,

나는 그 동안 남양주집 월세를 부동산에 내놓고 예전 톨게이트에서 함께 근무했던 영자언니를 만나서 차 한잔 마시고 헤어졌다.

남편과 작은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더니  막내동생이 사다 놓은 케익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딸들의 생일선물은 6천원짜리 장갑 두 컬레와 편지 한 통이었다.

이것도 받고 싶지 않았는데 매년 엄마아빠 생일을 챙기지 않는 딸들이 되면 안된다고 해서(습관이 된다고 해서) 

딸들이 뭐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딸들의 용돈수준에 맞춰 장갑을 받고 싶다고 해서 장갑을 선물로 받아서 지금 잘 끼고 다니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일은 챙겨주되 내 생일을 챙겨 받는 일이 솔직히 나는 피곤하다.

기념일이라고 무슨 날인데 챙겨주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하다는 감정을 잊고 산지가 꽤 된 것 같다.

남편이 미안하다고 했다. 내 생일을 기억 못해서 챙겨주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딸들이 며칠전부터 하도 떠들어대서...

 

나는 나중에 두 딸들에게 엄마 생일 안 챙겨준다고 토라지고 서운해 하는 엄마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매년 다짐한다.

대신 두 딸들의 생일은 거르지 않고 챙겨주는 엄마는 될 것이다.

기념일이라고 뭘 챙겨 받는 것, 내겐 익숙하지 않다.

 

올해 탁상 달력에도 내 주변 사람들의 생일은 체크하되, 정작 내 생일날엔 그냥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낸다.

그런 것에 속상해하고 서운해 해야 하는데...... 이런 것도 습관이 된다고 스스로가 나를 챙겨야 한다는데........

내 생일날까지 내가 겪어야 할, 또 하나의 집안 행사처럼 느끼는 것보다는 조용히 평범하게 지나가는 게 되려 나는 편하다.

아직은 내가 젊은가보다. 생일 안 챙겨준다고 서운해하지는 않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