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휴가는 친정에서....

2013. 8. 27. 13:19★ 나와 세상

 

 

 

 

 

 

 

 

매년 여름휴가를 다녀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년에 한 두번 들리는 친정행이 휴가의 전부였다.

덥기도 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여름휴가를 다녀오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지난 토요일 친정에 내려갔다. 남쪽으로 갈수록 비가 무섭게 쏟아졌었다.

논에 농약 하는 것과, 고추밭 수확을 한 번이라도 도와 드리고 싶었는데 내려가던 첫 날에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일손은 못 도와드리고 대신 엄마를 모시고 벌교 외갓집에 다녀왔다.

 

 

올해 일흔 한 살이신 친정엄마는  아흔 다섯이신 외할머니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인다고 하셨다.

먼 거리가 아님에도(차로1시간20분정도) 차멀미를 심하게 하시는 엄마에게는  외할머니 한 번 뵈러 가는 일조차 쉬운일이 아니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더더욱 그런데  이럴 때 차를 끌고 와준 우리 부부가 고마우셨나보다.

이번 친정행에도 남편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딸인 나만 가는게 엄마도 편하실테니까...

남편이 올해 들어 부쩍 친정엄마를 챙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친정 가는 길에도 남편과 교대로 운전을 했다. 외갓집 가는 길엔  내가 운전을 했다.

울 엄마, 사위 차 한 번 얻어 타는게 그리 미안한 일인지 내 남편보고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

짜증이 났다. 그 동안 16년동안 시어머님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시어머님은 한 번도 며느리인 내게

한 번도 미안해하거나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48년을 외할머니를 모시고 계시는 큰 외숙모에게도 서운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울 엄마도 딸이면서 시누였다.

 

 

 

 

 

 

보성시조부모님 산소에도 들렀다.

벌초를 안했는지 잡초가 무성했다. 역시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와 돌아가신 다음이랑은 차이가 있었다.

낫질에 서툰 나도 남편과 함께 벌초를 했다.

2시간 넘게 벌초를 하던 중에 어떤 아저씨가 오셨다.

본인이 다음 달 초에 벌초를 해주기로 하고, 시작은아버님께 돈을 미리 받았다고~~

 

 

친정아버지 산소는 친정집에서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새아버지가 수시로 관리를 하시기 때문에 따로 벌초를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벌초를 했다.

그 날 밤에 낮시간에 했던 몇 시간의 낫질 때문에 어깨가 좀 아팠지만 이번 친정행은 참, 편안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앞으로는 수시로 친정에 와야지...... 우리 두 딸들에게 앞으로는 "엄마는 왜 맨날 서울 할머니(시어머니)집에만 가?"

라는 말을 듣고 사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 번 추석에도 친정에 내려오자는 말도 남편이 먼저 했다.

 

 

 

 

 

 

일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났다.

고추를 따러 갔다. 아침 10시 30분까지 땄다.

올해 들어 이미 고추는 5번이상을 따서 팔았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내 몸 컨디션이 좋아서 기분 좋게 고추 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도 처음 해보는거라 힘들기보다는 재미있다고 말했다. 힘들었을텐데 그리 말해줘서 고마웠다.

 

 

오후에는 6시부터 8시까지는 녹두를 땄다.

올해는 녹두나 고추가격이 그다지 좋치가 않다고 하셨다. 풍작이라서 그렇단다.

녹두 따는 일이나 고추 따는 일, 모두 허리가 안 좋으신 두 분이 하시기는 넘 벅찬 일이었다.

수 십마지기 논농사와 수 천평 되는 밭농사 전부를 두 분이 하시기는 벅차 보였다.

앞으로 논과 밭농사 모두 줄이시라는 당부를 다시 한 번 했다.

 

 

 

 

 

 

전라남도 장흥은 1970년 양력 12월 22일날 태어나, 1989년 2월 14일날 장흥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살던 고향이다.

그럼에도 친정아버지 산소를 영암으로 이장하고 나서는 한 번도 고향에 들리지 못했다.

거의 7,8년만에 들러 본 장흥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유명 관광지가 되어 있었고, 인기프로인 1박2일에도 얼마전에 소개된 곳이기도 하다. 거긴 들리지도 못했다.

시조부모님 산소 벌초를 끝내고 영암 엄마집으로 가는 길에, 큰 맘 먹고 들린 고향이었다.

 

 

내가 졸업한 장흥여고는 실업고로 바뀌어 있었지만 운동장 푸른 잔디밭은 변하지 않았다.

친정집에 들릴 때마다 보성 시조부님 산소는 매번 들렀으면서도 내가 태어난 고향 장흥은 지나쳐만 갔었다.

여고 때, 친구들도 장흥에 많이 살고 있다는 걸, 얼마 전에 가입한 여고밴드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도 있고, 농협과 우체국과 경찰서에 근무하는 친구와 장흥에서 크게 마트를 하는 친구도 있고,

또 다른 동창중 한 명의 남편이 장흥에서 유명한 한의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나치듯 나도 꿈을 꿔 본다. 내 고향으로의 귀향을.........

 

 

내가 살았던 장흥에서도 원도리라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싸다는 보도를 수 년전에 본 기억이 난다.

그 곳에 있던 장흥집도 몇 년전에 팔아서 이제는 내 연고지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고향을 찾지 않게 된 것 같다.

이번 추석에는 동생가족도 친정에 내려가면 한 번은 원도리에 아직도 살고 계시는 큰어머님과 동네어른분들도 찾아뵙고 싶다.

나이가 드니 웬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 그리워진다.

올3월에 상피암 진단을 받고 맘고생을 한 뒤부터,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나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