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3. 10:32ㆍ글쓰기 공부, 연습
‘남편, 아침 김밥, 치아보험 해지완료(09:30 상담원 통화), 논현동 판촉 ,대리운전 23:50 귀가’
‘보미, 오전 10시30분 담임 샘과 전화상담, 영, 수 학원비 송금, 친구 소담 생일선물 구입-틴트’
‘혜미, 진로 조사서 학교 제출, 칭찬일기 우수상 받아옴, 친구 다영과 같이 학원감 (김밥세줄)’
‘나, 시모 안부전화 (김장준비, 건강), 친모 쌀 택배 받음, 막내와 저녁,’
‘수능일, 미얀마 도착한 박대통령, 유럽 탐사선 로제타 최초 혜성착륙,
' 영화 <카트> 염정아(손석희Jtbs뉴스) 인터뷰, 전 국립중앙의료원장 20대 여직원 성추행 입건, 세 모녀 3법 국회 논의’
지난 달 수능일 내 수첩에 기록한 내용들이다.
나에겐 주변 일들을 기록한 수첩 7권과 가계부 18권이 있다.
18권의 가계부에는 우리 집 수입 지출현황은 물론 가족과 관련된 일상들이 간략하게 기록 되어있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다툼의 원인과 서로에게 퍼붓던 상처 되는 말들과
딸 들을 꾸짖으면서 했던 막말의 내용들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놓기도 했다.
그래서 수첩과 가계부의 메모란 은 늘 부족했다.
수첩과 가계부는 파란만장했던 내 결혼생활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는 치부책이나 자서전 같은 의미다.
이런 메모를 하게 된 것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첩을 우연히 발견하고 나서 부터였을 것이다.
시골 가난한 집 딸 셋 중, 맏이였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초가집에 살던 우리 집 형편으로는 아버지 지병인 폐렴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가장으로서 제 몫을 못하면서도 자존심만 강했던 아버지는
할머니와 엄마가 빌려온 돈으로는 병원 치료 받기를 거부하셨다.
내 기억속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무서운 분이셨다.
초등학교 입학 후 받아쓰기 연습을 할 때마다 글자를 다르게 쓰거나 몸의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아버지가 휘두르는 회초리의 바람 가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맏이라는 이유로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던 내게 아버지만은 넘어설 수 절대권력 같은 존재였다.
1977년 5월 늦은 밤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엄마와 두 동생은 작은방에서 잤고 할머니와 나는 아버지와 함께 큰 방에서 잤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늦은 시각까지 마루에 앉아 계셨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방으로 모셔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쭈빗거리며 할머니의 말을 전하던 나를 아버지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쳐다보셨다.
정확한 시간은 생각나지 않는다. 잠결에 무슨 소리엔가 눈이 떠졌고,
옆에는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뉘이고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핏덩어리를 게워내고 있는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진곤아! 진곤아! 내 아들 진곤아! “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다 깬 8살이었던 나는 그게 어떤 상황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부릅뜬 눈과 그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너무 무섭기만 했다.
할머니의 울음소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커지고 집 마당에는 불이 켜졌다.
건넛방에 주무시던 엄마가 맨발로 뛰어와 우는 모습이나,
뒷집 살던 고숙과 고모가 달려와 허둥거리는 모습도, 내게 고정되어 있던 아버지의 눈빛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나를 향해 팔을 뻗으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외면했다.
그리곤 주변에 몰려 있던 어른들 중 한 명 뒤로 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움직임은 정지 되었고 할머니의 흐느낌이 통곡소리로 바뀌었고,
엄마의 ”보형이 아부지! 보형이 아부지! “ 라는 울부짖는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피로 범벅이 된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장례를 치루는 내내,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묘지까지 따라가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운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를 내게 생명을 준 생물학적 존재이외의 의미로 인정하기 싫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솟구칠 때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참았다.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학년 초, 가정환경 조사 때마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 낙인 찍혀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든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 부재로 엄마와 할머니가 겪어야 했던 고생스러움과 스무 살이 넘어 동생들과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버지 대신 내가 감당해야 했던 동생들 뒷바라지와 집안 경조사를 챙기느냐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내 청춘이 가여워 아버지의 대한 원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갔다.
아버지는 미남이셨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는 한문과 영어도 쓰실 수 있었고
동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난하고 병약한 남자였다.
네 명의 여동생(고모들)들과 남동생(작은아버지)까지 책임져야 하는 홀어머니의 장남이었다.
그래서 훤한 인물과 나름 지식인이었지만 서른이 훨씬 넘어서까지도 결혼을 못했다.
그런 조건들을 마다 않고 결혼을 감행한 엄마는 어쩌면 아버지의 그런 복합적인 분위기에 끌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늘 잔기침을 하셨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만 보내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초겨울 시골집 앞마당에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 병은 전염되는 폐결핵이 아닌 총각시절 논바닥으로 구르면서 농기구에 심하게 부딪혔는데
돈이 없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얻은 가슴 병이라는 것도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7년이 지났고 엄마가 지금의 새아버지와 재혼을 하신지 20년이 넘었다.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면 꿈꾸는 눈빛이 되어 너희 아버지는 자상한 남자였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자상함과는 너무 거리가 먼 분이셨고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엄마는 아버지를 잘 생기고 자상한 남편으로 기억하고 계신다.
올봄에 아버지 유골을 화장해서 경기도 인근 절에 모셨다.
산소 쪽으로 도로가 뚫린다는 말을 듣고 동생들과 아버지 산소를 이장 할 건지 화장해서 절에 모실건지 여러 차례 의논을 했었다.
딸만 셋인 우리 집은 동생과 나, 둘 다 큰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가진 탓에 매년 명절 때마다 시댁 차례를 준비하면서 남모르게 운 적이 많았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준 부모에 대한 인간 본연에 대한 죄송함 때문이었을 뿐,
그 안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8살이던 나도 아버지의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6살,4살이던 두 동생들은 아버지를 사진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친정아버지 묘지 이장 문제를 의논하던 동생이
“언니,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 계시면 우리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라는 말로 아버지의 대한 그리움을 내비쳤다.
동생들은 아버지의 대한 기억이 없는 만큼 원망과 미움도 없다.
아버지의 대한 짧은 기억들마저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나와 다르게 동생들은 아버지에 대해 애틋함을 갖고 있다.
동생들은 자주 내게 아버지의 대해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대한 원망이 그나마 덜해진 계기가 있었다.
스물 살 무렵, 여고생인 두 동생과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명절날 할머니가 계시던 시골에 내려갔을 때였다.
시골집 정리를 하다가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수첩 한 권을 우연히 발견했었다.
나와 두 동생이 태어났을 때와 엄마와 부부싸움을 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버지의 심정을 적은 짧은 글들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병약하고 무능한 남자로서 번민과 세 딸들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그 수첩에 적고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아주 조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아버지가 유독 내게만 엄하게 대하고 겨울이면 우리를 바깥바람을 못 쐬게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습관적으로 뭐든 메모하기 시작 한 것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융통성 없음과 까칠함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원리원칙만 고집하고 세상에서 나쁘다는 것들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더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기를 썼다.
두 동생에게도 본보기가 되는 맏이가 되어 동생들의 버팀목 돼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살았다.
맏이인 내가 바로 서야 두 동생들도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강박증은 나로 하여금 미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없애버렸고 가족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폐쇄적인 성격을 갖게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돈에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면 일체 거절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약한 맏이면서 쓸데없는 자존심으로만 똘똘 뭉쳤던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것이다.
무능하고 병약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으면서도 자존심과 꼿꼿함을 지키려고 했던
아버지를 나는 누구보다도 그리워했고 닮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융통성 없음과 메모하는 습관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자리가 어떤 건지 모른다고, 아버지의 대한 좋은 기억도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지금은 아버지를 꿈속에서 만나면 눈물을 흘린다.
꿈속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울어도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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