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2017. 7. 19. 14:00책,영화,전시회, 공연




아무도 나에게 술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우르르 일어나 식당으로 가버릴까봐 나는 초조하고 두려웠다.

말수가 줄고 표정이 우그러졌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과 사무실 탁자 주변이나 써클룸 창가를 서성였다.

나가 봐도 안 좋은 일을 당했거나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하면 당장 내 눈엔 생기가 돌고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된 내용을 연기하고 있었고, 동기 녀석은 그걸 알아채고 누설한 것이었다.


무슨 얘기냐고 몰으니, 그 선배 왈, 자기 평생에 어떤 술자리에서도 결코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인간이 두 명 있는데 그게 바로 A와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선배의 말은 나를 묘한 충격에 빠뜨렸다. 내가 정말 평생 술자리에서 평생 술자리에서 한 번도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해본 적이 없던가?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술자리가 파장으로 치달을 때면 나는 다시금 오후 다섯시의 신데렐라적 불안을 고스란히 되풀이해야 했다.

아무도 나와 술을 마셔주지 않고 우르르 일어나 집으로 가버릴까봐 나는 초조하고 두려웠다.

그런 내가 설마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했을리야. 나는 일면식도 없는 A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 권여선 소설집<안녕, 주정뱅이> 작가의 말 중에서 ---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술주정뱅이 남편과 부부로 살면서 좀 더 남편을 이해보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알콜 중독자들의 이야기들이 묶여 있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국어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는 노력도 해봤다.

술은 일체 입에 대지 않는 사람으로 48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부분은 많았지만,

술을 찾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비뚤어진 캐릭터의 모습에서,

술 대신 사람에게 집착하고 내 자신을 늘 못미더워하고 불안해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즐겨마시는  술은 '소맥'이다.

맥주잔에 소주잔으로 반컵 정도를 먼저 붓고 남은 팔할 정도는 맥주로 채운다.

그리고 늘 원샷을 한다.

술잔이 술 마시는 일행을 두세번 돌고나면 서로에게 솔직함을 가장한 채

같은 술주정뱅이들은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다.

늘 맨 정신으로 술자리에 동석했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로서는 그런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난주에 한 번 새벽3시, 어제도 새벽 4시에 들어왔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서 들어왔다.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 있는 것인가?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남편의 깊은 절망감이나 불안함때문에

나약한 남편이 매일 취하고 싶은걸까?

아니면 그저 술에 영혼을 이미 뺏겨 버린 늙은 술주정뱅이, 알콜 중독자일뿐인가?


힘들고 괴롭고 외롭고 사는게 아무리 고달퍼도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술에 취해 살면 안될 것 같은데....

나도 힘들고 외롭고 고달퍼도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싶지 않는데...

스트레스를 풀어도 가정에 타격을 주면서까지 해소하면 안되는 게 아닌가....

엄만데... 아이들이 날 보고 닮아갈텐데.... 이런 생각이 젤 먼저 들던데...

그래서 남편과 나를 지금까지도 술에 관해서는 늘 평행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