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엊그제 밖에서 놀다가 이마가 조금 찢겨져서 들어왔다.
내성적이고 때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투명하지 보이지 않는
아이라서 내가 윽박 한번 지르면 소리도 못내고 우는 큰아이가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면서 들어왔다.
남자아이들은 키우면서 팔이나 다리가 한두번쯤은 부러지거나 어디가
찢어지거나 한다지만 난 여자애둘만 키워서 그런지 크게 다치거나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적도 없는 엄마라서 그런지,
그리고 아이들이 다치고 하는것에 그리 놀라거나 기겁을 하는 엄마는
아닌지라 많이 놀래지는 않았지만 큰아이의 큰울음소리에 놀랬다.
흉터는 남을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서 괜찮다고, 친구랑 놀다가 그런거니까
그 친구 미워하지 말라고, 원망하지 말라는 말부터 챙겼다.
다음날 동네 아줌마중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엄마가 보미의 이마 상처를
보더니 메디팜인가를 사서 발라주라고 말해주고 엄마인 나보다
더 보미 이마 상처에 더 속상해 하는 모습에 다시 난 반성하게 된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남에게 양보하면서 살라고
가르치는, 다소 타인을 위헤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도 내 엄마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좀 손해보고 뒤에서 서운해 할지라도 나 좋을려고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행동은 나쁘다고 가르치는 엄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나는 내 두아이들에게 무조건 참기만 하라고
가르치는 엄마로 존재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든다.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타거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때에
난 내 아이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돌아다니거나 떠드는 행동을
못참아 하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게 당연하지만 내 아이들의 앞으로의 교육차원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보다는 내 아이들이 버릇없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대도 방치하는 경우없는 무식한 부모의 모습이
되기 싫은 나의 허영심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아주 싫어한다. 나도 아이를 가진 엄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심하게
떠들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돌아다님에도 그 부모라는 사람들이
가만 두는꼴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부글거리는 나의 모습때문이다.
난 심하게 아이들을 싫어하는 여자였다.
그나마 내가 엄마가 되고나서, 내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떠들기도 하고 말썽도 부린다는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어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난, 산만하고 시끄러운
거기다가 버릇없는 아이들은 지독하게 싫어하는 아줌마이기도 하다.
나 어릴때, 내가 엄마에게 종종 듣고 자란 말이 하나 있다.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벌써 나는 8살밖에 안된 내딸에게 그런말을 할때가 있다.
보미야 넌 엄마처럼 사는게 좋아보이니?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면 공부든 노래든 춤이든 그림이든 피아노든 운동이든
한가지정도는 아주 지독하게 끝내주게 잘해야 한다고. 이런 말을 달고 산다.
남을 때리고 남에게 해를 입히기 보다는 늘 맞고 들어오는 쪽이나
해를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더 많은 큰아이때문에 속상한적도 많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래도 착하게 살아라를 강요하는 엄마로 존재하고 있다.
착한 사람에겐 착하게 나쁜 사람에겐 너도 똑같이 나쁘게 대해라 라고
가르쳐주고 싶을때가 더 많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큰아이와는 다르게 웬지 말투 하나나 또래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 절대로 맞고 다니지는 않을것 같고 야무지고 지 몫은
챙기고 살것 같은 작은키의 6살난 작은아이가 내 입장에선 덜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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